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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Mar 12. 2020

불가능을 가능으로

사력을 다해 덤비는 데모대에 육중한 철문은 맥없이 부서졌다. 철문 주변 여기저기서 맹렬히 불길이 치솟았다. 시청 주변은 아수라장이 되고 있었다.

2007년 10월, 전국 노점상연합회(전노련) 회원들이 고양시청으로 몰려들었다. 2천 명인지 3천 명인지 그 수를 알 수도 없는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며칠 전 노점상 남편 사망이 뇌관에 불을 질렀다. 대대적인 노점상 단속이 있은 다음날이었다. 역세권 주변을 대상으로 용역원을 동원한 시의 단속에 노점상들은 폭력으로 맞섰다. 각목과 쇠 파이프가 난무했지만 단속원들은 노점상들의 몸에 손을 댈 수도 없었다. 손이 몸에 닿기도 전에 노점상들은 땅바닥에 뒹굴기부터 했다. 단속원들이 무차별 폭행을 당하는데도 경찰은 폭행 현장을 애써 외면했다. 정보 형사는 단속하는 구청장을 협박까지 하더라고 했다. ‘폭력 노점상을 체포하면 바로 다음날 높은 곳에서 풀어주라는 전화가 오는데 잡으면 뭘 하느냐’며 볼멘소리를 하는 경찰관도 있었다. 

일산 미관광장은 노점상 전시장이었다. 정발산역 육교 밑은 밤이면 포장마차가 불야성을 이루었다. 노점상 대표단과 협상을 통해 몇 가지 합의를 이끌어냈지만 합의문은 며칠을 못 가 휴지조각이 되었다. 믿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했던가? 노점상 실태를 파악하기로 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상당한 재력가들이 노점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점뿐 아니라 일반점포를 몇 개씩이나 가진 노점상도 있었다. 이들로부터 노점을 임대해 영업을 하는 노점상들은 의무적으로 전노련에 가입해 회비를 내야 했다. 전노련은 노점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회원이 아닌 사람들의 노점은 폭력으로 내쫓고 있었다. 길거리에서 할머니들이 푸성귀를 파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고양시 노점상의 반 이상이 고양시민이 아니었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고양시민도 아닌 사람들이 고양시 요지를 점거하고 자신들은 세까지 받아가면서 푸성귀나 파는 불쌍한 할머니들을 내쫓기까지 하다니. 분노가 치밀었다. 기업형 노점상들을 모두 쫓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정말 노점을 해야 할 사람들이 자유롭게 노점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단속은 곧 싸움이었고 전쟁이었다. 

단속을 하는 과정에서 한 노점상 가족이 자살을 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일용직 노동자로 그 부인이 초등학교 앞에서 붕어빵 노점을 하고 있었다. 그는 노점을 한 경력이 없었고 그 부인은 단속지역이 아닌 곳에서 노점을 하고 있어서 단속을 당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전노련은 시의 단속 때문에 그 사람이 유명을 달리했다면서 유족으로부터 장례절차 등을 위임받고 시신을 안치한 관내 병원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장례는 뒷전이었고 고인은 전노련의 투쟁 동력을 키우고 시의 노점상 단속을 중단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었다. 우리 집 주변에는 경찰 병력이 배치되고 대문 앞에는 24시간 의무 경찰이 보초를 섰다. 아침마다 소복을 입은 고인의 영정 사진을 든 여인들이 대문 앞을 지켰다. 

시신을 볼모로 한 농성이 보름을 넘기고도 전노련은 장례를 치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시민들이 오히려 몸이 달아 시장실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장례비용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불어나기 전에 장례부터 치르자고 했다. 병원비는 어떻게든 처리할 테니 그만 끝을 내자고 병원 대표가 찾아오기도 했다. ‘노점상 단속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죽음을 이용하는 전노련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불의에 지는 것이고 노점 단속은 물 건너가고 마는 것’이라고 설득해야만 했다. 

친정부 언론들은 연일 시의 노점상 단속과 관련된 보도를 쏟아내고 있었다. 단속하는 시는 악마로, 폭력으로 맞서는 노점상은 불쌍한 피해자가 되고 있었다. 노점 단속원들이 노점상 좌판을 뒤엎고 군홧발로 짓밟고 쇠파이프로 마구잡이 구타까지 한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폭력은 노점상이 가하고 단속원은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기만 하는데도 진실은 왜곡되고 가려졌다. 언론중재위원회의 중재로 일부 언론이 정정 보도를 하기는 했지만 사후 약방문이었다. 거기에 사정을 모르는 일부 시민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단속을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를 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을 통해 노점대책을 발표했다. 2007년 10월 29일이었다. 

△주요 지하철역 주변에 저소득층 노점을 허용한다. 노점상의 자격, 노점의 위치, 개수, 업종, 크기, 기간 등 기준을 정하고 대상자를 엄선하여 이들이 도로점용료를 내고 떳떳하게 영업을 할 수 있게 한다. △저소득 노점의 자격기준을 정하기 위해 재산 상황, 소득, 거주지 등 실태조사를 실시하되 이에 불응하는 노점은 대상에서 제외한다. △기업형 노점에 대해서는 상시적, 지속적으로 단속을 계속하되 전업을 원하는 노점상에게는 지원책을 마련하고 업종전환을 지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시가 병원비 등 장례에 대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자 독이 오른 전노련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사로 쳐들어갔다. 당에서 시장에게 압력을 행사하라는 시위였다. 일산 중앙로를 점거하고 시가행진을 벌이고 촛불집회를 하며 고양시를 휘젓기도 했다. 보다 못한 시민들이 나섰다. 고양시를 대표하는 128개 시민단체 대표들이 주엽역 광장에서 ‘전노련의 폭력시위 즉각 중단’을 요청하며 이 요청에 불응할 경우 ‘불법 노점 불매운동’을 전개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11월 1일이었다. 곧이어 고양 범시민대책위 회원 5천여 명이 ‘경찰이 불법집회를 계속 방치하면 경찰에 책임을 묻겠다’는 선언을 하고 가두행진을 했다. 노한 시민들이 대거 전노련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특히 ‘불법 노점상 불매 서명운동’ 선언에 전노련은 큰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시는 기자회견에서 밝힌 노점대책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노점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구체적인 노점대책을 실행할 전담팀을 시청과 구청에 설치했다. 이들 팀을 이끌 시청과 구청 팀장은 업무 의욕을 갖춘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이어야 했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적임자를 선정하고 본인의 의사를 물었다. 싫으면 맡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흔쾌히 수락을 했다. 공개모집을 한 팀원은 지원자가 적어 본인 뜻과 무관하게 차출을 해야 했다. 시에서 노점상 단속 전담부서를 조직했다는 소식을 듣고 전노련 회원 20여 명이 야간에 일산동구청에 난입하여 직원들을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도 직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전노련은 한 달 가까이 고인의 장례를 치르지 않다가 쌓이는 병원비를 어쩌지 못하고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서는 더욱 격렬한 투쟁을 전개했다. 시는 예정대로 불법 기업형 노점상 철거와 저소득 노점상 합법화 작업을 밀어붙였다. 노점상 허용을 골자로 하는「고양시도로점용허가 및 점용료 등 징수조례」를 만들고 노점상 허가기준과 허가 품목을 정했다. 그러나 노점상들은 고양시를 믿지 않았다. 전노련 집행부는 노점상들에게 시의 실태조사에 응하지 말라고 종용을 했다. 전노련의 강압에 1차 신청에 응하는 노점상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신청기간을 며칠 연장하면서 노점상 21명이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들만을 대상으로 적격심사를 하려고 했지만 실무진들의 읍소에 추가 신청을 받기로 했다. 그때까지 눈치만 보던 노점상들이 마지막 날 294명이 신청서를 접수했다. 최종 적격심사에서 선정된 168명과 이후 역세권 이외의 지역에 허가를 요청한 40명을 합해 208명에게 노점상 허가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후에 허위신청, 대리영업이 일부 밝혀져 이들을 뺀 179명에게 최종 노점 판매대 설치를 허가했다.

 노점상은 실제 소득이 최저 생계비의 150% 이하 가구나 4급 이상의 장애인으로 가족 총재산이 1억 원 미만인 사람으로 2007년 10월 1일 현재 고양시에 거주하면서 2007년 8월 이후 고양시에서 노점을 하고 있던 사람으로 자격을 국한했다. 노점을 할 수 있는 품목에 조리 음식이나 술, 음란물은 제외했다. 판매 품목이 중복되는 경우는 시가 중재를 하여 중복을 피하고 가게 위치는 시가 정하는 곳에서만 할 수 있게 했다. 노점판매대는 공모를 통해 정한 디자인과 규격으로 시에서 일괄 제작하여 공급했다. 가게에는 번호와 사진, 명패를 붙이고 전기를 공급했다. 노점상 명칭은 공모를 통해 '길벗가게'로 이름 짓고 도로 점용료를 매월 5만 원씩 부과하기로 했다. 기업형 노점상을 몰아내고 저소득층 노점상을 허용하겠다는 시의 의지를 확인한 노점상들은 고양시를 믿고 협조를 하기 시작해 2008년 6월 전노련을 탈퇴하고 7월에는 고양 노점상연합회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길고도 길었던 노점상과의 전쟁은 종식되었다. 길거리는 산뜻해지고 깨끗해졌다. 노점상 단속 인력이 불필요 하게 되자 매년 수십억 원씩 집행되던 단속 용역비는 필요 없게 되었다. 합법 노점상에 선정되지 못한 일부 노점상들에게는 소상공인 창업자금 지원, 저소득층 생활안정자금 융자 등 대책을 마련해 주고 공공근로사업 참여를 지원하기도 했다. 

고양시의 노점정책은 이후 많은 지자체의 벤치마킹 대상이 되었고 국민권익위는 전국 지자체에 도로점용허가 조례 개정을 통해 노점상 허가 근거 마련을 권고하기도 했다.

불법 기업형 노점상을 몰아내고 길벗가게를 만들기까지는 어려운 과정의 연속이었다. 수많은 직원들이 노점상들에게 두들겨 맞았고 병원에 입원을 했다. 노점상들 또한 여러 명 옥살이를 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 사무총장이 노점상 단속을 연기하라는 전화를 하기도 했고 관내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선거 기간 동안 단속을 중단하자고도 했다. ‘노점상 표보다 노점상으로 인해 불편을 겪는 시민들 표가 훨씬 많다’는 논리로 설득을 하면서 단속을 강행했다. 처음 노점상 단속을 시작했을 때 직원들은 하나같이 저러다 말겠지 생각하고 곧 항복할 것이라고 쑥덕거렸다고 했다. 노점상과의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시민이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다. 

노점상 단속에 힘을 모은 고양시 직원들의 노고는 잊을 수가 없다. 고양시 직원 전원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으면 고양시 노점정책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민들의 격려와 도움 또한 성공의 큰 동력이었다.

노점상이 길벗가게로 재탄생되고 나서 몇몇 가게들이 약속을 어기고 길벗가게를 임대하는 등 불법행위를 하여 허가가 취소되는 일이 있었다. 나름대로 딱한 사정이 있었지만 노점정책을 뿌리부터 흔들 수 있는 일이라 당초 방침을 그대로 밀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의 가슴 아픈 사연에 잠시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지만 인정에 이끌려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시청 팀장의 주장에 마음을 다잡기도 했다.

가끔 길벗가게 옆을 지나가노라면 붕어빵이나 따뜻한 어묵 국물, 커피를 건네며 '덕분에 장사 잘하고 있다'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길벗가게 사장님들의 따스한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맛보기도 한다.           

잊지 못할 일화 하나.

경찰청 고위 간부로 있던 친구가 노점상 단속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관내 경찰서장들과 주말 저녁자리를 마련하겠다면서 나오라는 전화를 해왔다. 비서도 운전기사도 없이 혼자 우리 시를 찾은 그 친구는 약속 시간보다 너무 일찍 오게돼 호수공원을 한 바퀴 돌아보고 나오니 길가에 세워둔 차가 보이지 않더란다. 불법주차 단속 견인차에 끌려 갔던 것이었다. 간신히 차량보관소를 찾아 차를 찾아오느라 약속 시간에 늦었노라고 미안해 하는 것이었다. 

 “강 시장, 정말 잘한다. 호수공원 주변에 주차된 차가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을 하면서도 불법주차 단속은 생각하지 못하고 길가에 차를 주차시켰다가 견인을 당했다. 어쩔 수 없이 벌과금을 물고 차를 찾아야 했지만 기분은 참 좋더라. 불법을 철저히 단속하는 고양시 행정이 정말 마음에 든다.”

노점상 단속에 고생하는 고양시를 성의를 다해 적극 도와주면 고맙겠다고 두 서장에게 그 친구가 간곡히 부탁을 했지만 서장 한 사람은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그가 직속상관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야당 시장이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경찰 서장이 이럴진대 전국의 노점상들과 싸운 고양시는 얼마나 힘이 들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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