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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석 Jun 19. 2020

할머니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왜 그랬을까? 그저 사랑스럽기만 한 손자에게 할머니는 주고 싶은 것을 주었고, 하고 싶은 것을 한 것 밖에 없는데 손자는 왜 그렇게 짜증만 내고 심통만 부렸을까?     


 안방은 할머니 방이면서 우리집 거실이었고 식당이자 침실이었다. 때로는 동네 할머니들의 놀이터였고 우리 아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했다. 더운 여름날을 빼고는 안방에서 밥을 먹었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겸상을 하고 나머지 식구들은 모두 둥근 밥상에 둘러앉아 함께 밥을 먹었다. 반찬은 다 똑같았지만 할머니 밥상에는 할머니를 위한 반찬이 한, 두 개 더 있을 때도 있었다.

 겨울철이면 안방은 동네 할머니들 차지가 되었다. 아침밥을 먹기 무섭게 동네 할머니들은 우리 집을 찾았다. 우리 집 안방은 크기도 했지만 외풍이 없어 할머니들이 놀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할머니들이 모인 방안은 늘 담배연기로 가득했다. 담배연기 가득한 안방에서 우리 아이들도 할머니들 뒤에서 우리끼리 놀았다.

 밤이면 안방은 침실이 되었다. 할머니와 누나, 여동생과 함께 안방에서 잠을 잤다. 잠자리에서 할머니 젖은 항상 내 차지였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밤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할머니는 호롱불을 껐다. 기름이 닳는다는 것이었다. 장난치기에 정신이 팔린 우리 남매들의 호롱불을 끄지 말라는 성화를 할머니는 옛날이야기로 달랬다. 할머니의 옛날이야기는 ‘별순이 달순이’ 하나뿐이었다. 그 이야기는 하도 들어서 어린 나도 자신있게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몸에 부스럼이 나거나 모기에 물려 생채기가 나면 할머니는 자다가 일어나 침을 발라 주었다. 잠을 자다가 발라주는 새벽 침이 특효라고 하면서. 배가 아플 때는 ‘내 손이 약손’이라며 아픈 배를 쓰다듬어 주었다. 신통하게도 할머니의 처방은 늘 효과가 컸다.

 자다가 뒷간에 가고 싶을 때는 할머니를 깨웠다. 할머니는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컴컴한 정랑(할머니는 통시라고 불렀다)으로 손자를 따라나섰다. 한밤중에 혼자 정랑에 앉아 있으면 컴컴한 변기통에서 금방이라도 시뻘건 손이 뒤를 닦아주겠다며 나올 같았다. 할머니는 가끔 헛기침을 하며 밖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지만 그래도 무서움을 잊기 위해서는 할머니를 불러야 했다.

 겨울철이면 방 안에서 아이들끼리 끊임없이 장난을 치며 놀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배 꺼진다 야들아, 인제 고만 해라”고 소리치곤 했지만 그런다고 그만 둘 우리들이 아니었다. 큰 방 윗목에 농을 올려놓은 나무로 만든 시렁이 있었다, 그 시렁에 그네를 매고 타고 놀다가 그만 시렁에 있던 농짝을 방바닥에 내동댕이 치는 사고를 내고 말았다. 할머니는 부서진 농을 망연자실 쳐다보기만 했지 우리를 혼내지는 않았다. 농짝은 어떻게 수리가 되었는지 다시 시렁 위에 올려졌다. 할머니는 그 농을 명절 때면 아주까리기름으로 반짝반짝 윤이 나게 정성 들여 닦곤 했다. 그 농은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왔다고 했다.

 겨울에는 손이 터져 피가 나 쓰라렸다. 할머니는 소죽을 끓이면서 소죽 솥에 물을 데워 그 물로 손을 씻겨 주곤 했다. 때가 새까맣게 낀 손은 할머니가 소죽으로 박박 문질러도 깨끗해지지 않고 찬바람에 터지곤 했다. ‘까마귀가 형님 하자고 덤비겠다’고 동네 어른들이 놀려대도 창피한 줄을 몰랐다. 

 할머니는 아주 알뜰해 물 한 방울도 함부로 버리지 못하게 했다. 물을 한 대야 가득 담고 세수라도 할라치면 할머니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우물물은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밤늦은 시간에는 호롱불도 켜지 못하게 했고 호롱불 심지는 최대한 낮추어야 했다. 

 그런 할머니가 집으로 동냥 오는 거지들은 그냥 돌려보내지 않았다. 쌀이나 보리쌀을 얼마간 주어 보냈고 밥을 얻으러 오는 거지에게는 따뜻한 밥을 먹여 보냈다. 이런 할머니 때문인지 우리 집에는 자고 가려는 장사꾼들이 많이 찾아왔다. 매년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도부장사들까지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하룻밤을 자고 떠나갔지만 장마철에는 며칠씩 묵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럴 때도 할머니는 싫은 기색은 커녕 떠나는 사람들을 더 묵고 가라고 붙잡기까지 했다. 떠나면서 명태나 오징어를 한, 두 마리씩 주고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냥 고맙다는 인사만 하고 떠나갔다. 그때는 세상인심이 그랬던 모양이다.

 여름이면 늘 꽁보리밥을 먹었다. 쌀이 한 톨도 섞이지 않은 시꺼먼 보리밥이었다. 그러나 할머니 밥은 늘 하얀 쌀밥이었다. 할머니는 그 맛있는 쌀밥을 다 드시지 않고 늘 반 그릇은 남겨 내게 주었다. 그러지 말라고 아버지가 말려도 할머니는 듣지 않았다. 누나 밥도 두 동생 밥도 모두 꽁보리밥이었지만 누나나 동생들 눈치도 보지 않고 할머니가 건네주는 밥을 늘 혼자서만 맛있게 먹었다.

할머니의 손자 사랑이 유달랐던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맨 위 형님 밑으로  여섯 형제를 줄줄이 없앴다고 했다. 홍역이나 백일해에 걸리면 그만이었던 시절이었다. 전쟁 통에 피난지에서 태어난 누나는 몹시 허약했다. 피난지에서 돌아왔어도 제대로 먹지를 못한 누나는 더욱 허약해져만 갔다. 그러는 중에 또 어머니 뱃속에 아이가 들어섰다. 어떻게든 누나를 살리고 싶었던 어머니는 뱃속 아이를 없애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기도 하고 간장을 사발째로 들이키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고추를 달고 태어난 아이는 울지를 않았다. 머리에  뒤집어 쓴 아기집을 벗기고 아이를 거꾸로 쳐들고 엉덩이를 몇 차례 치자 그제야 작은 소리로 울더라고 했다. 워낙 오랜만에 얻은 손자라 할머니에게는 귀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서 유독 나만 위하는 할머니가 싫었다. 방학에 집에 가면 할머니는 고구마를 구워 오거나 홍시를 들고 내 방을 찾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고맙기보다 짜증부터 났다. 할머니가 먹을 걸 방에 들고 들어오면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참 야는’ 하며 겸연쩍게 웃으며 군고구마나 홍시를 담은 바가지를 슬며시 방 한 구석에 밀어 넣고는 했다.      

군에 있을 때 딱 한번 할머니께 편지를 쓴 적이 있다. 할머니한테 편지를 쓰면 참 좋아하시겠다는 기특한 생각이 갑자기 들었던 모양이다.

“니 삼촌도 니 시이(형)도 군에 가서 내한테 핀지 한 장 없었는데 니가 내한테 핀지를 다 보냈구나.”

눈물까지 글썽이며 할머니는 편지보낸 것을 고마워 했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라 아예 편지를 보내지 않았을 테지만 글 모른다고 아들도 손자도 편지조차 보내지 않은 것이 할머니에게뭅시 서운하고 마음 아팠던 모양이었다. 내가 할머니에게 잘한 유일한 일인 거 같다.


 할머니는 91세로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다. 할머니는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집에 시집와서 온갖 고생을 다하며 재산을 일궜다고 한다. 어느 정도 살만해지자 할아버지는 집 가까이에 새로 집을 짓고 작은 할머니를 들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밥은 할머니집에서 드시면서 잠은 꼭 작은댁에서 주무셨다고 한다. 할머니 마음이 오죽 아팠을까! 저녁을 드시고 작은댁으로 가시는 할아버지를 보는 할머니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언젠가 우리 집을 찾은 외할머니가 그걸 어떻게 참고 견뎠느냐고 묻자

“속이 새까맣게 탔지요. 그래도 우째니껴, 그저 참고 전디야지요.”      

할머니는 고생스러웠던 옛날 얘기를 가끔 하곤 했다.

“내가 시집을 왔는데 집에는 숟가락 두 개 하고 밥그럭 몇 개 밖에 없더라.”

“새보(새벽) 첫닭이 울만 일어나 하루 쓸 물을 동짜(동쪽) 샘에 가서 퍼 와가 물두멍을 가득 채워야 했단다. 물 한 두멍을 다 채울라만 및 분을 샘에 왔다 갔다 해야 하는지 모른다. 물두멍을 가득 채우고 나만 그날 먹을 양식을 찧었단다. 디딜방아로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아침밥을 했단다.”

 “아침밥을 먹고는 잠깐 들에 나가 일을 하다가 새참을 만들었단다. 새참을 먹고 나만 또 일을 해야 했고. 그러다가 또 점심을 차리야 했지. 점심을 먹고 나만 또 일을 쫌 하다 새참, 그리고 저녁 준비를 해야 했고.”

 “저녁을 먹고 나만 밍(명)을 자아 실을 뽑았단다. 깜끼는 눈을 억지로 치 뜨만서 비(베)도 짜고 실도 뽑고 옷도 맨들었지.”

“빨래는 언제 하고 아는 언제 키우는데?”

“빨래야 틈틈이 눈치껏 했고 아야 지가 다 알아서 컸지.”

“그래 일을 하만서 재산을 늘리 나갔단다. 돈이 생기만 그저 땅을 샀단다, 십리를 가도 우리 땅 안 밟고는 못 가도록 말이다. 일꾼도 서이나 디리고 소도 두 마리, 시 마리씩 키웠지.”

 “난리 때 피난을 가만서 소를 다 끌고 갈 수는 없어 피난 가기 전날 한 마리를 안 잡았나. 아무도 소고기를 안 먹더라. 마당 한 구석에 땅을 파서 쌀 하고 나락하고 보리 담은 독을 잔뜩 묻어 놓고 피난을 갔지. 청도까지 말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땅을 팠지만 땅에 묻은 독은 누가 파갔는지 하나도 없더라.”

 “밥도 숱하기 얻어먹고 나무(남)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자기도 마이 했단다. 밥 빌로 가만 거지한테 줄 밥이 어데 있나꼬 카는데 열불이 나서 ‘이보소 나도 지왜(기와) 집에서 일꾼 서이 들이고 살았소’ 하고 쏘아주기도 했단다.”

 “멀리 있는 논 팔아가 집 앞에 문전옥답을 샀단다. 멀리 있는 논 서너 마지기를 팔아야 집 앞 논 한 마지기를 살 수 있었단다. 그 많던 논을 니 할배 아파가 서울 빙원 댕긴다꼬 날리고 니 서울 삼촌 학교에서 씨름하다 다치가 그거 곤친다꼬 또 날리고, 니 삼촌 대학 보낸다꼬 다 그래 안 날맀나.”

 할머니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고모 세 분을 두었지만 아이 하나 낳은 고모는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할아버지도 작은 할머니도 먼저 보내셨다. 아버지는 그런 할머니를 늘 마음 아파하시면서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늘 겸상을 하면서 반찬을 챙겨드리고 팔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아버지가 할머니 말씀을 거역하거나 짜증을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할머니는 무척 건강하셨다. 아파서 누운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늘 활기찼고 힘이 넘쳤다. 건강하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병원에 입원을 하고 수술을 하게 되자 아버지는 혹 할머니를 앞서 먼저 가실까 그게 걱정이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할머니는 늘 아버지 걱정을 했다. 멀리 병원에는 가보지를 못하고 집에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 소식을 들어야 했으니 오죽 갑갑했을까.

“내가 빨리 죽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오래 살아가 니 아부지가 저래 아픈갑다. 내가 죽어야 니 아부지가 날낀데...”

그러던 할머니가 90세를 넘기면서 가끔 정신이 혼미해지곤 했다고 한다. 임종을 얼마 앞두고서는 사람을 제대로 알아보지를 못했다고 했다. 일생을 함께 산 며느리도 몰라보고 누구냐고 묻곤 했으니.

아버지로부터 할머니를 와서 뵙는 게 좋겠다는 전갈을 받고 집을 찾았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할매?”

“아, 우리 헌식이 왔구나.”

일생을 함께 한 며느리도 몰라보던 할머니가 손자는 금방 알아보시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손자가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일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한없이 마음 아파하시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다행스러워하셨다. 어머니 앞서 가는 불효자식이 되지 않았음을 기뻐하시는 것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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