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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도바다 Feb 16. 2022

작은언니

[어렸을 때 초코초코 언니의 꽁무니를 따라다녔던 나]

형제는 자고로 지지고 볶고 해야 미운 정 고운 정이 뼛속까지 박힌다지만, 오히려 어른이 되면 상처를 주고받고 거리감이 생긴다. 바쁘게 돌아가는 지금, 서로를 잊고 지내다 보면 더러는 그 상처가 아물기도 한다. 

처음에는 덮고 참는 것이 능사라 생각했다. 아마 계속 언니 동생의 관계로 지내면 누구보다 사이가 좋았겠지만 일로 부딪치다 보니 소원해지기 시작했다.


작은언니와 나는 누구보다 친한 자매 사이인데, 카페 일을 하며 잦은 다툼이 생겼다.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왜 그러냐며, 언니가 서운함을 들어냈을 때 얘기했다. "그때는 일적으로 얽힌 게 아니잖아." 성인이 된 후 가족 간의 의견 대립은 별로 없었지만 함께 문을 연 카페는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속초로 이사 온 낯선 환경에 서로가 힘들었다. 





작은언니는 어렸을 때부터 참 예뻤다. 동네에서도 예쁨으로 사랑을 독차지했고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교복을 입어도 독보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대학교 4년 내내 연극 공연 때 주인공만 할 정도로 연기도 잘했지만 그때도 내 눈에는 제일 예뻤다. 그만큼 언니는 연기에 열정이었고 누구보다 빛났다. 졸업 후에도 많은 응원을 했지만 탤런트 시험도 없어져 언니의 꿈은 무너졌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시작했다. 내가 아는 언니는 배우로서 꿈도 많고 연기도 정말 잘했는데, 동기들에 비해 잘 풀리지 않았기에 지금 생각해봐도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언니가 결혼할 때쯤엔 돌려 막기 하고 있던 내 카드빚도 갚아주고, 내가 잘 되길 항상 응원했고, 결혼해도 형부와 함께 셋이 여행도 많이 다니며 서로 의지하고 잘 지냈다. 그런데 늦은 나이 아이가 태어나고 몸도 많이 아파 여러 가지 변화를 겪다 보니 하나, 둘씩 작은 일들에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서로를 보듬으며 부모님 없이 함께 한 세월이 길다. 5살인 언니도 어렸는데 더 어린 동생인 내가 있으니 인형놀이, 소꿉놀이는 물론 놀이터에서도 늘 함께 했고 밥도 잘 챙겨주는 착한 언니였다. 

태어날 때도 내 곁을 꼭 지켜준 언니였는데, 

만약 언니가 힘들었을 때 엄마가 곁에 있었다면 마음 편하게 투정도 부리며 더 빨리 이겨냈을 텐데, 

내가 도와주고 싶어도 엄마처럼 모든 것을 내어주기엔 마음만큼 쉽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 지금은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지내고는 있지만, 언니와 동생의 끈끈한 관계로 의지했던 시간을 회복하기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다. 

언니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은 물어보지 못했다. 

물론, 언니는 예전의 모습에서 벗어난 막내 동생에 대한 서운함이 더 크지 않을까. 

하지만, 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이 겹치며 더 깊은 속내를 끄집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지금 언니에겐 가족이 있어 다행이다. 마음도 약하고 외로움도 많은데 행복하기만을 바랐던 내 마음에는 변함없다. 딸이 태어났을 때 온 세상의 행복을 다 가졌듯, 사랑하는 딸과 스스럼없이 잘 지내고 누구보다 의지하고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아프지 말고 마음 편하게 잘 살면 좋겠다. 


그리고 삶의 한 귀퉁이는,

언니 스스로도 자신을 위한 공간을 만들고 늦지 않게 '어렸을 때의 꿈'도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오늘이 제일 젊다고 하지 않는가. 

웃는 모습이 이쁜 언니, 언젠간 마주 보며 환하게 크게 웃고 싶다. 

난 그것밖에 바라는 게 없다. 




내 인생에서 제일 좋은 어떤 시절이 있었다면, 그 높은 곳에서 내려오기는 정말이지, 쉽지 않다. 

'내려놓기'가 좀처럼 쉽지 않기에 자꾸 부여잡고 '그 화려한 옛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말로는 이제 욕심을 버렸다 하지만 내 눈엔 그 욕심이 사람들에게 보인다. '보여주는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난 사람을 볼 때 첫 번째로 '두 눈'을 바라본다. 

눈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이 훤이 보이기 때문이다. 

거짓말을 할 때도 눈은 흔들리고 진실을 말할 때도 눈은 요동칠 수 있지만 그 판단을 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어도 감당할 수 있다. 삶은 항상 행복한 버라이어티만 있을 순 없다. 그 삶을 수긍하며 사는 것도 한 방법이기에 오늘을 살다 보면 내가 원하는 삶을 나도 모르게 살고 있지 않을까. 조금의 무료함도 이제는 한 구석에서 익숙해지는 일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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