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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고희 Mar 28. 2022

부부는 무엇으로 살까요

어느 간 큰 남편 이야기

아침에 싱크대 위칸을 열었더니 마치 레고 블 쌓아놓은 것처럼 반찬통이 차곡차곡 게도 쌓여있다.

싱크대 수납장이 꽉 찼다는 건 바로 냉장고가 텅 비었다는 것을 의미할 터, 반찬거리는 안 떠오르고 저 큰 냉장고를 이리 비워도 되는 걸까 속으로 뜨끔하던 찰나, 남편이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어? 냉장고가 비었네?" , 마치 반찬 투정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라는 듯 괜히 사람 좋은 척 껄껄 웃 계란 두 개를 꺼내어 부쳐 먹는다.

큰아이가 기숙사 가면서는 원래도 요리에 흥미가 없었는데 음식 하기가 싫어졌다. 입 짧은 딸아이는 늘 간식거리로 배를 채우, 남편은 자기 입으로 기는 김치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니 더 손을 놓게 되었다고 하면 비겁한 변명이려나.


늘 쓱 배송만 시키다가 오늘 해가 좋길래   장 보러 이마트 쪽으로 부지런히 땀날 만큼 걸다.

요즘 잠깐 일을 쉬고 있어 집에서 삼식이 놀이를 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한 번씩 숨이 턱턱 막혀 온다.

김치만 있으면 된다는 건 그냥 하는 소리고, 실상은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 고, 나는 속이 안 좋아 튀긴 요리보다 푹 삶은 백숙 같은걸 좋아하는데 남편은 물에 끓인 고기는 해서 닭볶음탕, 닭갈비 같은  일절 안먹는다. 

생선 종류는 비린내 난다고 입도 안대 참치찌개나 생선 조림, 북엇국도 안먹고, 편식도 싫어하 결국, 매번 로 썰은 김치에 물 반찬 종류별로 너 덧가지 해서 국이나 찌개랑 먹는 5첩 반상 정도를 원하는 것 같은데.... 음, 이런 남편을 보통 간 큰 남자라고들 한다지 아마.

입맛은 또 어찌나 까다로운가. 하루도 안빼놓고 음식이 짜네 싱겁네, 미원을 더 넣마네, 다시다를 어야 감칠맛이 도네 어쩌네, 여기엔 참기름 말고 들기름 써야 되네 어쩌네... 

님아, 제발 그 입 좀 다물 다물라!

모처럼 밖으로 나오니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남편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어쩌다 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 새삼 사람 인연 +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게 인류애적 관점!에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 성격, 취향, 음식 기호, 정치 성향, 삶의 방향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대체 서로의 어떤 부분에 끌렸던 걸까.

그제는 남편이 코로 앓고 난 큰아이 먹인다고 소고기 갈빗살을 잔뜩 사왔데, 큰아이와 나는 소고기가 안맞아서 먹으면 꼭 탈이 나기 때문에 먹는다고 그렇게 귀에 피딱지  얘기했건만, 또 부득부득 사와서는 한입만 먹어보라며 조르는 것이다.

결국 아이가 입안의 달콤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점 두점  밤새 탈이 났고  낮 두시나 돼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

모처럼 집에 와서 쉬어야 하는데, 내내 아프다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간 것이다. 배탈 나서 아픈 아이에게 남편은 또 가는 길에 얼큰한 짬뽕이나 한 그릇 사먹자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진짜.

다음 소고기 먹이지 말 신신당부 해놨는데, 아마도 두어달 뒤면  없이 사와서 기어이 먹야 말지....

가끔 아이들이 모두 출가하고 남편과 둘이 남는다면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는데 아우야, 나도 원룸 하나 얻어서 나가든지 해야지, 안돼 안돼...


얼마 전 남편 성향이 하도 궁금해 mbti좀 해보라고 슬쩍 핸드폰을 들이밀어 보았는데, 안해줄 줄 알았더니 왜 또 그건 그렇게 쓸데없이 열심히 한대?! 아무튼 결과는 너무도 의외였다. infp (내향 감정형)! 

엄청 예리하고 지적인 척 날카로운 척 매사 시니컬하게 하도 비판 모드이길래 이론가형일 줄 알았더니, 이렇게 감성적인 캐릭터였다니.

생각해보니 연애할 때 저 멀리 수화기 너머로 기타 치며,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분위기 잡으며 스스로의 노래에 도취되곤 하던 사람이었다는 게 퍼 떠올랐다. 래 맞아, 그런 사람이었지... 그 순수함에 반했었지...

그런 사람이 혹시 드라이하고 잔정 없는 나를 만나 이십여 년을 그런 척 연기를 하고 고 있는 건가 갑자기 안쓰런 마음이 잠깐 다.


장 보와서 리 풀 우나 고우나 내 할 일은 해야지 싶어, 오이 깍둑썰기하듯 툭툭 잘라 부추랑 후루룩 무쳐놓고, 미역줄기  쪼로록 빼서 간간이 볶아놓고, 진미채 달달 양념 휘둘러 슬쩍 팬에 뜨겁게 한번 어놓고, 꽈리고추 멸치볶음 하려다 힘들어서 남편에게 입에 맞게 직접 해라 하니, 새삼 맛있게 하면서 왜 그러냐며 나에게 다시 을 넘긴다. 나에게 미루고 나서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 어쨌 이거면 최소 3일은 용하겠지.


그냥 이렇게 본척만척, 이해 안 되는 듯 이해해 가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게 부부라 믿으며.


우리집에 이렇게 많은 밀폐용기가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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