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싱크대 위칸을 열었더니 마치 레고 블럭을 쌓아놓은 것처럼 반찬통이 차곡차곡 빼곡하게도쌓여있다.
싱크대 수납장이 꽉 찼다는 건 바로 냉장고가 텅 비었다는 것을 의미할 터, 반찬거리는 안 떠오르고 저 큰 냉장고를 이리 비워놔도 되는 걸까 속으로 뜨끔하던 찰나,남편이 냉장고를 열어보더니 "어? 냉장고가 비었네?"하다가, 마치 반찬 투정하려고 꺼낸 말은 아니라는 듯 괜히 사람 좋은 척 껄껄 웃으며 계란 두 개를 꺼내어 부쳐 먹는다.
큰아이가 기숙사 가면서는 원래도 요리에 흥미가 없었는데 음식 하기가 더 싫어졌다. 입 짧은 딸아이는 늘 간식거리로 배를 채우고, 남편은 자기 입으로 자기는 김치만 있으면 된다고 했으니 더 손을 놓게 되었다고 하면 비겁한 변명이려나.
늘 쓱배송만 시키다가 오늘 해가 좋길래 걸을겸 장 보러 이마트 쪽으로 부지런히 땀날 만큼 걸었다.
요즘 잠깐 일을 쉬고 있어 집에서 삼식이 놀이를 하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한 번씩 숨이 턱턱 막혀 온다.
김치만 있으면 된다는 건 그냥 하는 소리고, 실상은 꼭 국이나 찌개가 있어야만밥을 먹고, 나는 속이 안 좋아 튀긴 요리보다 푹 삶은 백숙 같은걸 좋아하는데 남편은 물에 끓인 고기는 싫어해서 닭볶음탕, 닭갈비 같은 걸 일절 안먹는다.
생선 종류는 비린내 난다고 입도 안대서 참치찌개나 생선 조림, 북엇국도 안먹고, 간편식도 싫어하니 결국, 매번 새로 썰은 김치에 나물 반찬 종류별로 너 덧가지 해서 국이나 찌개랑 먹는 5첩 반상 정도를 원하는 것 같은데.... 음, 이런 남편을 보통 간 큰 남자라고들 한다지 아마.
입맛은 또 어찌나 까다로운가. 하루도 안빼놓고 음식이 짜네 싱겁네, 미원을 더 넣네 마네,다시다를 넣어야 감칠맛이 도네 어쩌네,여기엔 참기름 말고 들기름을써야 되네 어쩌네...
님아, 제발 그 입좀 다물라 다물라!
모처럼 밖으로 나오니 숨통이 트이는 듯하다.
남편을 보고 있으면 내가 어쩌다 저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됐을까,새삼 사람의 인연+ 호르몬의 작용이라는 게인류애적 관점!에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든다.성격, 취향, 음식 기호, 정치 성향, 삶의 방향 어느 것 하나 맞는 것이 없는데, 우리는 대체 서로의 어떤 부분에 끌렸던 걸까.
그제는 남편이 코로나 앓고난 큰아이 먹인다고 소고기 갈빗살을 잔뜩 사왔는데, 큰아이와 나는 소고기가 안맞아서 먹으면 꼭 탈이 나기 때문에 안먹는다고 그렇게 귀에 피딱지 앉게 얘기했건만, 또 부득부득 사와서는 한입만 먹어보라며 조르는 것이다.
결국 아이가 입안의 달콤함을 뿌리치지 못하고 한점 두점 먹다가 밤새 탈이 났고 다음날낮 두시나 돼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
모처럼 집에 와서 쉬어야 하는데, 내내 아프다가 다시 기숙사로 돌아간 것이다. 배탈 나서 아픈 아이에게 남편은 또 가는 길에 얼큰한 짬뽕이나 한 그릇 사먹자며....
가끔 아이들이 모두 출가하고 남편과 둘이 남는다면 하고 생각해 볼 때가 있는데 아우야, 나도 원룸 하나 얻어서 나가든지 해야지, 안돼 안돼...
얼마 전 남편 성향이 하도 궁금해 mbti좀 해보라고 슬쩍 핸드폰을 들이밀어보았는데, 안해줄 줄 알았더니 왜 또 그건 그렇게 쓸데없이 열심히 한대?! 아무튼 결과는 너무도 의외였다. infp(내향 감정형)!
엄청 예리하고 지적인 척 날카로운 척 매사 시니컬하게 하도 비판 모드이길래 이론가형일 줄 알았더니, 이렇게나 감성적인 캐릭터였다니.
생각해보니 연애할 때 저 멀리 수화기 너머로 기타 치며,'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한껏분위기 잡으며스스로의 노래에 도취되곤 하던사람이었다는 게 퍼뜩 떠올랐다. 그래 맞아, 그런 사람이었지...그 순수함에 반했었지...
그런 사람이 혹시 드라이하고 잔정 없는 나를 만나 이십여 년을 안그런 척 연기를 하고 살고 있는 건가 갑자기 안쓰런 마음이 잠깐 들었더랬다.
장 보고 와서 장보따리 풀며미우나 고우나 내 할 일은 해야지 싶어,오이 깍둑썰기하듯 툭툭 잘라 부추랑 후루룩 무쳐놓고, 미역줄기 짠기 쪼로록 빼서 간간이 볶아놓고, 진미채 달달 양념 휘둘러 슬쩍 팬에 뜨겁게 한번 섞어놓고, 꽈리고추 멸치볶음 하려다 힘들어서 남편에게 입에 맞게 직접 해보라 하니, 새삼 맛있게 잘하면서 왜 그러냐며나에게 다시 공을 넘긴다. 나에게 미루고 나서 또 무슨 잔소리를 하려고....어쨌든 이거면 최소 3일은 조용하겠지.
그냥 이렇게 본척만척, 이해 안 되는 듯 이해해 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게 부부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