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 금요일 오전 10시경부터 카톡이 되지 않았다. 전날 밤,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음을 해놨는데도 진동음이 몇 초 간격으로 계속 울려서 밤새 잠을 설쳤다. 다음 날, 독서모임 전 신랑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한 번 봐달라고 했다. 그의 해결책은, 핸드폰 ‘초기화’였다.
다행히 진동음은 사라졌지만, 카톡을 비롯한 모든 앱이 다 사라졌다. 단순히 다시 깔면 되겠지 싶었지만, 문제는 '내가 해외에 있다는 점'이었다.
한국의 휴대폰을 사용하고 있지 않기에 ‘본인인증’을 요구하는 앱들에 접속이 불가했다.
대부분이 한국에서 쓰던 앱들이라 없어도 그만인 것들이 많았지만, 카톡과 브런치는 달랐다.
요즘 내 생활은 카톡과 브런치, 두 앱이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뉴질랜드에 와서도 한국에서 하던 독서모임을 온라인으로 이어가고 있었고, 브런치에서는 ‘엄마의 유산 프로젝트’를 연재 중이었다. 모임도, 소통도 모두 온라인으로 이뤄졌기에 이 두 가지가 되지 않으니, 핸드폰은 무용지물, 삶은 일시정지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심란해서 아무것도 집중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마음을 내려놓기로 했다. 그러자 오히려 고요해졌다. 처음으로, 정말 온전히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썼지만, 전과는 달랐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롯이 나를 위한 글쓰기였다. 정신이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내 할 일을 하다 보면, 알아서 해결되겠지.’
그 사이, 내 주변엔 여러 일들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잡음이 없을 수 없고, 예상치 못한 일도 피할 수 없다.
'이 모든 상황이 어쩌면 나를 시험하는 것이거나,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겠지.'
그렇게 한 주쯤 지났을까, 점점 불안이 올라왔다.
사실 나는 매일 글을 쓰면서, “어디에 쓰는지가 뭐가 중요해?”라는 생각 해왔다.
글을 쓴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지, 발행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이 문서파일에 계속 글을 썼다.
하지만 발행하지 않으니, 반응도 없었다. 그렇다 보니 점점 글을 써야 한다는 열정이 사그라들었다.
그 시기에 ‘엄마의 유산’ 출간 원고에 집중할 수 있어서 완전히 손을 놓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원고 작업도 거의 마무리되자, 브런치에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다시 강하게 올라왔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공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큰 의미였다는 걸.
세계적인 경영 사상가 게리 해멀은 말한다.
“디지털 경제는 ‘공유하는 것’이다. 자신의 기술과 콘텐츠를 널리 공유해야 영향력과 지위를 얻는다.(주1)”
맞다.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단지 책을 내지 않더라도, 사람들과 연결되기 위해 나는 글을 쓰고 있었다.
릴케는 한 젊은 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마음 깊은 곳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가서 당신에게 글을 쓰도록 명하는 그 근거가 당신의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뿌리를 뻗고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글을 쓸 수 없게 되면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주 2)“
그 질문에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는 나의 지식과 경험, 그로부터 얻은 지혜 - 나의 매일의 일상에서 건져낸 것을 사람들과 나누기 위해 글을 씁니다. 그리고 그렇게 나누는 과정 속에서, 나 역시 누군가의 열정과 에너지로 살아갑니다.”라고 말이다.
이 19일간의 브런치 공백은,
‘왜 글을 쓰는가, 왜 공유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을 찾는 시간이었다.
나는 매일 누군가의 글에서 영향을 받고 나의 글도 또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다. 누군가가 쓴 한 편의 글이 내 삶을 바꾸었듯, 나의 글도 누군가의 삶에 조용히 스며들기를 바란다.
19일의 쉼은,
내가 가고자 하는 길의 의미를 더 깊이 새기고, 나를 깊숙이 들여다보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기다려주신 독자분들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의미를 담은 진심의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주 1> 무자본으로 부의 추월차선 콘텐츠 만들기, 송숙희, 토트,
주 2>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