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육과 통일성에 대해 지난 글에서 이야기한 바 있다.
4세 무렵의 아이들은 적절한 훈련을 통해, 다른 모든 충동보다 규칙과 목표에 자발적으로 따르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놀이’안에서 훈련은 아이의 자아를 잘 통합하고 사회에 쓸모 있는 사람으로 성장시킨다. 충동적인 만족을 위한 개인성을 훈련하고 억제하며, 규칙을 따르는 것을 통해 적절한 기능을 수행하고 잘 통합된 자아로서 사회에 조화가 되는 것이다.
아이에게는 그래서 ‘바운더리’, 즉 한계가 필요하다.
얼마전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 아이가 소파에 앉아 얼굴에 아이스팩을 얼굴에 대고 있었고, 선생님은 다른 친구에게 맞았다고 설명해주었다. 알고 보니, 한 남자아이가 여러 친구들을 때리고 다녔고, 이를 본 또래 남자들이 그 친구의 모습을 따라하며 5명 정도가 함께 친구들을 때렸다고 했다.
때린 아이를 보니 낯이 익었다. 예전에도 친구와 언성을 높이며, 선생님이 앞에서 중재하고 있음에도 폭력적인 행동을 멈추지 않던 아이였다. 선생님은 그 아이의 부모와 이야기를 나눠보았지만, 아이가 집에서 훈육이 잘 되어있지 않고, 아이에게 명확한 경계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사실 나도 그 아이와 엄마의 모습을 종종 본 적이 있다. 아침마다 유치원 앞에서 아이가 들어가기 싫다고 떼를 쓰는 일이 반복됐고, 엄마는 아이의 감정을 달래며 설득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어쩌면 아이의 기분을 존중해주려는 엄마의 따뜻한 배려였을지 모른다. 다만, 그 상황에서 아이가 한계나 규칙보다 자신의 감정이 더 우선된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원장선생님은 말씀하셨다.
“ 지금 이 4~5살 이 아이들에게도 바운더가 필요합니다. 그랬을 때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조절하고, 규칙에 따르는 법을 배워야 스스로 서는 힘이 생겨요. 그 안에서 자율성과 자립성이 자라나는 거에요.”
나는 그녀의 말에 깊이 동감했다.
사실 우리 아이도 처음 유치원에 갈때 가기를 싫어해 울며 떼를 쓰곤 했다. 그때마다 나도 속이 상하고, 달래고 싶은 마음에 아이의 기분대로 데려가지 않은 적도, 유치원 앞에서 도로 집에 데려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아이는 유치원이라는 사회에 더 적응을 못하고 그 시간만 지연시킬 뿐이었다. 그 후로 아이가 세상을 믿을 수 있는 방법을 배우길 바라며 조금씩 경계를 세워나갔다. “선생님이 잘 돌봐주실 거야. 엄마는 몇 시에 데리러 올게.” 이렇게 말하며 아이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연습을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실제로 선생님 손을 잡게 하자, 아이가 조금씩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아이는 정해진 그 ‘규칙’에 따르며 스스로 안정을 찾았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엄마를 찾지 않고 친구들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한국에서뿐 아니라 새로운 환경의 나라인 뉴질랜드의 유치원에서 적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한계 설정’는 비단 아이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른에게도 필요하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 꼭 해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마감 시간을 정해두면 어떻게든 해내게 된다.
그 안에서 몰입이 생기고, 집중력이 올라가고, 그때 비로소 나조차 몰랐던 잠재력이 발휘된다.
누구나 이런 경험을 한번쯤 해봤을 것이다. 시험기간이 닥쳐서 벼락치기로 공부를 했을 때, 개학을 코앞에 두고 밀린 숙제들을 단 며칠만에 해내기도, 마감일이 다가와 미뤄뒀던 보고서를 끝냈던 경험들 말이다.
결국 우리는 ‘정해진 시간’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최선 이상의 것을 끌어낸 적이 있다.
나 역시 최근에 또 한 번의 그런 경험을 하고 있다.
요즘 매일 글을 쓰고 행하는 것 목표인데, 처음엔 시간을 정해두지 않았다.
아침에 어느 정도 써두고는 “오늘 안에만 올리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미루다 보니 결국 저녁이 되어서야 올리게 되었고, 중간에 다른 급한 일이 생기게 되면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생겼다. 그리고 해야하는 다른 일들도 영향을 받게 된 것이다. 글 하나 발행하는 일이 하루 전체 흐름을 망치게 된 것이다.
아침 8시, 한국시간으로 새벽 5시에 글을 올리기로 했다.
새벽 5시에서 5시 30분에 기상해 스트레칭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6시부터 책상에 앉는다.
1시간 책을 읽고, 1시간은 초집중으로 글을 완성한다.
그 전날 미리 준비해놓은 것은 없다. 그 시간 안에 글감부터, 글쓰기, 퇴고까지 마친다.
막상 해보니 나도 몰랐던 초집중의 힘이 나왔다. ‘어떻게든 그 시간 안에 해내야 한다.’는 스스로 정한 한계가 초집중, 몰입을 이끌어냈다. 안될 것 같은 것은 느낌을 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도 몰랐던 집중력과 속도를 경험하고 있다.
결국 '바운더리'는 우리를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나를 가두고 훈련해나가다 보면 우리는 그 안에서 나를 깨고 내 안의 더 큰 무한한 나를 만나게 된다. 그것을 통해 내가 생각했던 나보다 훨씬 더 강한 집중력, 해내는 힘, 자립적인 태도와 같은 진정한 나의 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 해내야만 하는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스스로를 제약한다. 그것은 존재의 이유다. (주1)"
“살다 보면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이 더 강하고 유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줄 기회가 온다. 상황이 제 필요에 따라 우리를 능력자로 변모시킬 때(이것이 바로 신의 뜻이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잠재성(어린 시절의 마법의 힘)이 밖으로 드러난다.(주2)"
주 1> 질서 너머, 조던 피터슨, 웅진 지식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