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를 판단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다 >
얼마 전, 아이들의 행동을 모니터하고 부모에게 올바른 훈육방식을 알려주는 한 프로그램을 보았다. 엄마에게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던 초등학생 남자 아이의 이야기가 소개되었는데, 거기에서 유명한 정신과 교수님이 자신의 엄마를 폭행하는 아이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사람을 때리는 건 범죄야. 이 세상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때릴 수 있는 사람은 없어.”
우리는 언제부터 누군가를 다치게 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을까.
이 세상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때리거나 다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 모두는 귀하게 태어난 고귀한 존재들이다. 자라온 환경과 방식은 서로 다를 수 있지만, 우리가 이 세상에 귀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진리이다. 그렇게 귀한 우리가, 과연 어느 누군가를 해할 수 있을까. 설령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질렀다 할지라도 말이다.
물리적으로 타격을 주는 것만이 폭행은 아니다.
말로, 시선으로,
나의 기준과 판단으로
우리는 얼마든지 누군가를 다치게 할 수 있다.
나의 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의 잣대에서 벗어난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비난할 자격은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없다. 그 자체로 사람은 존재할 이유가 있다. 세상의 기준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는 모두 그 안에 빛을 품은, 사랑으로 지음 받은 존재다. 살면서 그 빛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아가며, 그 빛은 점점 희미해지고 퇴색되어 가기도 한다. 그러나 빛은 사라지지 않는다. 생명이 있는 한, 그 빛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 빛 자체인 우리는 맞고 틀림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람을 바라보고 대할 때, 잣대를 내려놓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그 자체의 본성, 그 사람 안에 있는 빛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성경에도 이런 장면이 나온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자를 끌고 와 예수 앞에 세우고,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고 요구했을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하나둘 자리를 떠났고, 결국 예수님과 그 여자만 남게 되었다.
예수께서 여인에게 물으신다. “너를 정죄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여인이 대답한다. “주여, 없나이다.” 그때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요한복음 8장 5–11절)
예수님은 죄를 가볍게 여기신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을 판단할 권한이 인간에게 없음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또 말씀하신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요한복음 8장15~16>”
이 말씀 앞에서 나는 나의 지혜와 지식을 내려놓게 된다. 내 머리에서 나온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가 내 안에 머물 때에야 비로소 온전한 분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한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고린도전서 3장 18~20 >”
내가 지혜롭다 생각될수록, 더 내려놓아야 한다.
판단하기보다 멈추고, 정죄하기보다 바라보고, 돌을 들기보다 내려놓는 쪽을 선택하는 것.
그때 비로소, 나는 진정 지혜로워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