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가끔씩 우연처럼 신기한 일이 생긴다. 마침 새롭게 간 곳에서 생각지 못했던 옛 친구를 만나거나, 갑자기 일정이 변경되어 공백이 생겼는데 때마침 그 시간에 누군가가 연락 와서 만나기도 하는 '신기하다'라는 말에 가까운 일들이 살면서 종종 일어난다. 예전에는 그저 '신기하네.' 하고 지나쳤던 일들이 책을 읽고 있는 요즈음은 그런 작은 우연들이 다 신이 만들어 놓아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신은 특정종교에서의 신이 아닌 인간의 창조주,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신을 말한다.)
오늘 그런 일이 일어났다. 평소 같으면 그저 '신기하네~ '하고 지나쳤을 일이 온전히 그동안 겪지 못했던 새로운 일인 것처럼 경험을 하게 해 준 날이었다. 5시 반에 일어나 6시부터 하는 새벽독서모임을 끝내고 1시간 더 책을 읽고 아이를 깨워 아침을 먹이고 어린이집에 등원을 시키고 나니 오전 10시 반, 집에 와서 간단히 집안일을 하고 미뤄왔던 볼 일을 보러 집을 나섰다. 백화점 근처에서 30분 정도 볼 일을 보고 나니 11시 반, 언제부터 인지 부러져서 사용할 수 없게 돼버린 아이라이너를 사러 근처 뷰티 스토어에 들러 아이라이너와 화장솜을 사고 나오며 혼자 점심을 근처에서 먹고 갈지 그냥 집에 가서 먹을지를 고민하던 차에 집어든 핸드폰엔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엄마'였다. 자주 전화하여 '밥은 먹었는지, 엄마가 반찬 했는데 갖다 줄까, 아이는 어린이집에 잘 갔는지.. ' 등등 소소한 일상을 물어보는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엄마의 부재중 전화였다. 아무 생각 없이 아니 의무감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어디야?"
" 잠깐 나와있어. "
" 엄마도 여기 OO 병원 왔다 백화점 근처인데.."
" 나도 백화점 근천데?"
" 그래? 안 그래도 별일 없음 밥 먹으러 나오라고 하려 했는데 밥 먹자. 어제 막국수 먹고 싶다며 막국수 먹으러 가자."
" 아니, 막국수 말고 돈가스 먹으러 가자."
말 그대로 신기했다. 엄마는 종종 밖에 나오시면 '점심 같이 먹자, 밥 먹었느냐.' 연락을 자주 하시는데, 나는 그런 엄마의 전화에 혹은 그런 요구에 반응한 적이 거의 아니 한 번도 없었다.
'아파, 졸려, 힘들어. 좀 쉬어야 해. 할 일 있어...' 등등의 이유였다.
내가 혼자 볼 일을 보러 나오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그런 날 엄마한테 연락 온 것이 엄마도 마침 나랑 같은 장소에 있었다는 것이 그리고 나도 점심을 혼자 먹어야 하나 고민하던 때였던 것이 이 모든 게 타이밍이 맞았다는 것이 신기했다. 엄마는 티를 내지는 않으셨지만 '응, 잘됐네. 그럼 같이 밥 먹자.'라는 말에 좋아하시는 게 보였다.
그렇게 우리는 근처에서 만나 경양식 돈가스 집으로 갔다. 경양식 돈가스 하나, 카레돈가스 하나를 시켰다. 뉴질랜드에서 한국 온 지 2년이 다 되어가는데 이렇게 엄마랑 단둘이 밖에서 밥 먹는 게 처음이었다. 엄마는 식사를 하시며 오늘 병원에 다녀오신 이야기를 꺼내셨다. 엄마에게 방울토마토며, 오이며 항상 박스로 보내주셨던 엄마의 초등학교 동창분께서 저번주에 갑자기 위독하셔서 병원 중환자실에 계셔 다녀오셨다고 하셨다. 저번주에도 다녀오셨는데 면회가 하루에 한 번 한 명으로 제한되어 있어서 뵙지도 못하고 오셨는데 오늘 또 궁금해서 가셨다가 미국에서 온 그분 아들분이 면회 들어갔다 오셔서 아들분과 이야기만 나누고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의식이 없으셔서 아들분이 들어가셨는데도 말씀도 못 나누고 눈물만 흘리고 오셨다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다던 분이 갑자기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입원하신 지 2주 만에 의식불명으로 중환자실에 계시다는 사실에 많이 충격을 받으셨는지 마음이 좋지 않으시다고 하셨다. 그렇게 엄마는 가슴 먹먹한 친구분 이야기를 하시다 중간중간 어제 보고 싶다고 와서 보시고는 아이는 오늘 어린이집 잘 갔는지, 어제 갖다 준 갈비는 잘 먹었는지, 김서방은 출근 잘했는지.. 안부를 또 물으신다. 아이도 잘 갔고, 어제 해다 주신 갈비도 너무 맛있게 잘 먹었고 (김서방은 3그릇이나 먹었고) 오늘 아침에도 엄마가 해다준 오징어국에 밥 먹고 갔다고도 말씀드렸다. '그려, 밥은 챙겨 먹고 가야지.' 하시는 말씀에 흐뭇함이 배여 나오신다. 엄마는 본인 의사 표현 잘 안 하시고 감정표현도 잘 안 하시고, 본인 낮추시며 다른 사람들 맞추며 살아가시는 게 미덕이라 생각하시는 전형적인 충청도 사람이시다. 그런 엄마가 무슨 이야기 중에 그러셨다. "너는 연락도 잘 안 하고, 연락도 잘 안 받으니..." 내가 '어떻게 연락했대. 신기하네.'라고 물었던 듯하다.
사실 그런 이야기도 잘 안 하시는 분이다. 전화 안 받으면, 내가 당연히 피곤하니까 자는 줄 아시고, 할 일 있어할 일 하는 줄 아시고 이유도 잘 캐묻지도 않으신다. 전화하다 '잠깐, 애기 뭐 해줘야 해서, 잠깐 오빠 와서.'라고 가족들 이야기만 꺼내면 "그래그래, 얼른 끊어." 라며 하던 말도 못 하시고 부랴부랴 끊어버리는 엄마가 처음으로 이야기하셨다.
"너는 연락도 잘 안 하고, 연락도 잘 안 받으니까..."
평소에는 그렇게도 엄마 말 잘만 받아치는 난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내가 왜 그랬을까? 바쁘고, 힘들고, 피곤하기도 했지만 왜 유독 엄마한테만 그런 티를 더 많이 냈는지.. 그럼에도 전화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내가 필요할 때만 하고 엄마랑 밥 한 번 같이 먹자라는 연락한 번 먼저 하지 않았는지...' 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엄마는 남은 음식이 아깝다며 싸가라고 하신다. 엄마나 나는 둘 다 소식하는 편이라 둘이 먹다 남은 음식이 돈가스 하나는 됐다. 나는 됐다고 했다. 그런데 이거 싸가면 한 끼는 먹을 텐데라며 하시는 말씀에 직원에게 남은 음식 포장해 달라고 했다. 내가 이걸 싸가야 엄마 마음이 편하다는 걸 알기에..... 그러면서 엄마는 포장을 해다 주는 직원에게 언제 꺼냈는지 카드를 내민다.
'하..... '
또 늦었다. 오랜만에 아니 거의 처음으로 엄마랑 단둘이 먹는 식사를 비싼 것도 아니지만 내가 대접하고 싶었는데 엄마는 역시나 또 나보다 빨랐다.
" 왜? 내가 내려했는데..."
" 누가 내면 어떻다고, 멀~~."
본인 거는 한없이 아끼시는 엄마가 나랑 있을 때는, 나한테 해줄 때는 돈 걱정 하나 없으신 것처럼 행동하고 말씀하시는 게 난 또 걸린다. 분명 반찬이나 다른 장 볼 때는 꼼꼼히 따져보며 조금이라도 저렴한 데로 가시는 엄마인걸 알기에....
" 잘 먹었어. "
그렇게 나는 또 엄마에게 얻어먹고 식당을 나왔다. 아침에 비가 억수로 퍼붓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초복을 하루 앞둔 7월 한여름의 해가 쨍하다. 엄마는 주섬주섬 양산을 편다. 그리고 내 팔짱을 끼신다.
'얼마만인지.... 항상 아이 안고 아이 케어하느라 엄마랑 이렇게 단 둘이 걸은 적도 없었다. 엄마는 그동안 얼마나 나랑 둘이 이렇게 팔짱을 끼고 걷고 싶었을까.... 아이 낳고 한국 와서 1년 넘게 산후우울증에 누워만 있던 딸이 얼마 전부터 조금씩 나아져서는 본인이 하겠다는 독서모임 한다고 또 바쁘다는 핑계로 엄마랑 시간도 못 갖고 이제 좀 건강해져서 같이 시간 보내려나 싶었더니 얼마 안 있으면 또 뉴질랜드로 돌아간다는 딸과의 시간이 엄마는 얼마나 아쉽고 아쉬우실까?' 왜 나는 그 마음을 이제야 알았을까?'
아니 나는 오늘도 몰랐을 것이다. 신이 나에게 그런 엄마의 마음을 알고 엄마와 있는 동안 시간을 더 자주 보내라는 의미로 우연찮게 오늘 잘 나가지도 않는 내게 볼일을 보러 밖에 나가게 하시고 엄마와 만나게 해주시지 않으셨다면 나는 오늘도 내일도 또 계속 이전처럼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는 또 당연하게 엄마의 연락은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고 지냈을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은 신께, 우연을 가장한 이 기회를 엄마와의 만남을 가질 기회를 주심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신의 그러한 목적이 잘 이루어지셨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양산을 쓰고 팔짱을 끼고 나란히 걷던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너자 곧 헤어져야 했다. 가는 길이 반대였기에.
" 가."
" 응, 가."
" 잘 가~ 엄마."
오늘은 헤어지는 엄마의 모습이 왜 이렇게 아련한 건지.. 엄마의 새로 난 흰머리가 왜 그리 도드라져 보이는지.. 다시 못 볼 사람도 아닌데 왜 이 헤어짐이 슬프기까지 한 건지....
'잘 가.'라는 말을 하고 뒤돌아 가는 엄마를 보는 마음이 이상했다. 그렇게 엄마랑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와서 요즈음 읽고 있는 책을 펼쳤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나왔다.
" 나는 오늘을 내 인생의 첫날로 여기리라.
내 곁에 가족들이 있음을 기뻐하며, 그들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리라. 그동안 숱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이해하지는 못했던 사랑이라는 감정을 고요히 공유하리라.
나는 오늘 내 인생의 첫날인 것처럼 엄마를 마주했고, 내가 인지하고 있지 않았을 때에도 엄마는 내 곁에서 항상 나를 걱정하고 내 생각을 하고 계셨음에 기뻐했고, 그런 엄마를 나는 처음으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오늘은 아침에 나와 엄마를 만난 일부터 집에 돌아와 읽은 이 책 구절까지 마치 누군가가 하나로 엮어놓은 것처럼 신. 기. 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