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운 세 살이라고 했던가? 아이가 만 2살이 되니 이제 자기주장이 생기고 말도 제법 잘할 줄 알게 되면서 가끔 아이가 하는 말에 '헉' 하고 놀랄 때가 있다. 불과 오늘 아침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아기상어를 보겠다는 딸에게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티브이를 보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도 딸은 굽히지 않고 아기상어를 보겠다고 보채기 시작하더니 보채는 걸 넘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이가 보채면 종종 타협을 하고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제는 안 되는 건 단호하게 안된다고 해야 할 것 같아 아침 먹고 어린이집 갔다 와서 보자고 다시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이는 내 말을 듣고도 자기 할 말만 하며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이쯤 되자 신랑이 합세했다. 안 그래도 자꾸 떼가 늘어가면서 한 번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고 벼르던 신랑이었다. 신랑이 떼쓰는 아이를 안방 드레스룸 안에 의자를 넣고 그 안에 앉혔다. 그리고 생각하고 나오라고 문을 닫았다. 아이는 더 고래고래 생떼를 부리고 나가게 해달라고 소리쳤다. 몇 분 지났을까? 아이가 울며 엄마를 찾기에 나는 황급히 문을 열고 우는 아이를 안고 달랬다. 그리고 아이가 울음이 그칠 때쯤 이야기했다.
" OO 야, 이쁘게 이야기해야지. 그렇게 소리 지르고 떼쓰면 엄마, 아빠가 안 들어주지. 그렇지?"
진정이 되어 내가 한 말을 알아들었을 텐데 아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다시 물었다.
"OO 야, 소리 지르면서 말하면 안 되는 거야. 알았지?"
아이가 답했다.
" 대답 안 할 거야."
끝까지 굽히지 않는 딸 앞에 신랑이랑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러면서 아이는 다시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상어 보여줘..'아이의 집요함에 우리는 더 이상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대신 또다시 타협을 했다. 밥 먹는 동안만 보고 나서 어린이집 가기로. 아이는 알겠다고 했고, 밥을 먹는 동안 보고 나서는 '다 봤다, 이제 끄자.'며 약속을 지켰다. 그 모습에 우린 또 놀랐다. 이제 고작 만 2살 하고 5개월이 된 딸은 벌써 자기 독립적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만의 방식이 있었다. 그것을 우리가 막무가내로 막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타협을 하고 제한을 정해두면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켰다. 그 모습에 우리는 우리의 훈육방식을 바꿔야 함을 깨달았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 후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나는 문득 나의 모습이 떠올랐다. 2살 딸아이의 모습이 딱 나의 모습이었다. 엄마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나만의 소신과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모습, 내 할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해야 했던 모습 말이다. 그러면서 그때마다 엄마가 끝에 기진맥진하지만 이을 악문 모습으로 나에게 하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 나중에 너랑 똑같은 딸 낳아 키워봐. "
무슨 일이 있어도 할 말은 해야만 했던 나
고등학교 때 H.O.T 에 빠져지 내던 때가 있었다. 서울에서 열리는 콘서트에 가기 위해 콘서트 티켓을 구해야 했다. 온라인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티켓판매를 지정된 은행에서 했다. 전국적으로 티켓오픈하는 날이면 그 당시 나의 우상이자 대한민국 10대 소녀들의 우상이었던 그들의 콘서트 티켓을 사기 위해 전날 은행 마감시간부터 줄을 섰다. 선착순으로 줄을 선 순서대로 먼저 들어가서 창구에서 티켓을 구매할 수 있었기에 티켓 오픈일이 다가오면서 나와 친구들은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꼬박 다 같이 샐 수는 없었기에 순번을 정해 시간별로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우선 전날은 은행 마감시간부터 줄을 설 수 있었기에 그날은 모두 학교 끝나자마자 같이 가서 앞자리를 확보해 두었다. 그리고는 저녁시간이 다가오면서부터 순번대로 자리를 지켰다. 나의 시간은 밤늦은 시간부터 새벽 1시 정도까지였다. 다행히 집에서 가까웠기에 엄마, 아빠가 주무신 틈을 타 몰래 집에 나와서 줄을 지켰고, 다음 친구가 와서야 바통을 터치하고 집에 들어왔다. 당일 아침에는 모두 모이기로 했다.나는 항상 아빠가 학교까지 차로 태워다 주셨기에 차를 타고 학교까지 가야 했고, 아빠 차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가다 아빠차가 떠난 걸 확인하고(지나고 보니 참 치밀했다..ㅎ) 다시 학교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 앞에는 친구들이 모두 모여있었고, 곧 은행 오픈시간이 임박했다. 우리는 꽤 앞이었기에, 앞자리 표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모두 들떠있었다. 그리고 곧 은행문이 열리고 은행 안에서 잠시 대기를 하며 유리문에 기대 있는 데 그 순간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밖에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순간 그 어떤 공포 영화보다도 더 무서운 공포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 사람은 바로 나를 방금 전에 학교에 데려다주신 아빠였다. 아빠는 나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나오라고 하셨다.
'큰일 났다..'
친구들에게 표 예매를 위임하고 밖으로 나왔다. 아빠는 이미 화가 온몸을 뒤덮어 내가 아는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빠는 다른 친구들까지 모조리 다 데리고 나오라고 소리치셨다. 아이들을 불러 세운 앞에서 '너희들 학교까지 빼먹고 정신이 있는 애들이냐.' 며 호통을 치셨다. 그리고 다시는 같이 어울리지 말라는 말과 함께 내 팔목을 낚아채 나를 끌고 나오셨다. 끌려 나오며 나는 머릿속에 멍해지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빠의 손에 끌려 집에 도착한 나는 엄마에게 인계(?)되었다. 이미 모든 상황을 다 알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엄마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으시고는, 종이에 네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반성문 3장을 쓰라고 하셨다. 그렇게 나는 방안으로 감금되었다. 나오지 말라고 한건 아니었지만 눈치가 보여 하루종일 방 밖을 나갈 수가 없는 반셀프 감금이었다. 그렇게 나는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폈다. 반성문을 써야 하는데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기 위해 티켓을 예매하려 한 것이 그렇게 까지 잘못인 건가 싶었다. 쓸 말이 없었지만 빼곡히 3장을 다 채워야 엄마의 화가 조금 누그러질 것 같았다. 나는 엄마, 아빠의 입장에서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은행에 간 걸 알게 된 건 학교 선생님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고 집에 전화를 해서였다. 그때는 방학이라 보충수업기간이었는데 그날은 담임 선생님이 나오지 않는 날이라 출석체크를 하지 않는 날인데 다른 과목 선생님이 그날따라 아이들이 많이 나오지 않아 유례없이 전화까지 한 것이었다.) 그래, 엄마, 아빠의 입장에선 학교까지 바래다준 딸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니 기가 찰 노릇이셨을 거다. 그것도 어릴 적부터 한 번도 속 섞인 적 없고 학업우수상도 꼬박꼬박 타왔던 딸의 첫 일탈이었으니 더 배신감이 크셨을 것이다. 그건 내가 잘못한 것이고, 엄마 아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행동이었다.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다. 3장을 빼곡히 썼다. 그리고 마지막엔 그래도 너무 가고 싶고 그래서 표를 끊은 것이니 제발 콘서트만큼은 가게 해 달라고 적었다. 그때 엄마, 아빠의 반응이 지금 신랑과 내가 느낀 반응이었을까? 엄마, 아빠도 어이없으셨는지 그때의 반응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의 집요함과 끈질김에 결국 마지막이라고 하시며 콘서트는 가게 해주셨다.
이십 년도 더 지난 이 일이 갑자기 떠오른 건 뭘까? 엄마가 아무리 뭐라 해도 자기 할 말은 다하고 티브이를 보겠다는 자신의 소신은 굽히지 않는 고작 2살 난 딸에게서 나는 20여 년 전 나의 모습을 보았으리라. 그래서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영리(?)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이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하루빨리 현명한 훈육방식을 찾아야 했다.
"너랑 똑같은 자식 낳아 키워봐."
나는 엄마의 바람(?)대로 나와 똑같은 딸을 낳았다. 아니 느낌상 나보다 열 배는 더 강한 아이가 태어난 것 같다. 아직은 어떤 방향으로 잡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방법을 찾아 아이의 그런 모습을 꺾지 않으면서 오히려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면을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아이로 자라는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올바른 길로 훈육하는 현명한 부모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