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매거진은 아이 낳고 산후 우울증과 전신 오한으로 2년 가까이 누워만 있었던 40살 엄마가 두 살 난 딸과 같이 성장해 가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할까? 나는 결혼하고 신랑이 있는 곳인 뉴질랜드에 가서 살다 그곳에서 코로나가 전 세계적으로 한참 퍼져있던 2021년 초에 첫 아이를 낳았다. 아이는 자연분만으로 3.5킬로의 몸무게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뉴질랜드 병원 특성상 아이를 낳은 지 6시간 만인 새벽 3시에 나는 아이와 병원에서 나와야 했고, 코로나로 외국인 전면 입국이 막힌 상황에 부모님도 한국에서 오시지 못하게 되어 산후조리는 꿈도 못 꾸고 내 몸 조리할 시간 하나 없이 아이 낳은 지 바로 그날부터 끝이 없는 무한 육아가 시작되었다. 아이 낳고 딱 하루만이라도 눈 좀 붙였으면 좀 나았을까, 그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던 상황에 아이 낳고 병원에서 쫓겨 나와 새벽에 3시간마다 깨서 모유수유를 해야 했다. 잠이 부족한 것이 가장 컸지만 그와 함께 힘든 건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혼자 불어난 젖마사지를 3시간마다 해대느라 모유수유한 지 일주일 만에 나의 손목과 손가락 관절은 너덜너덜해질 대로 너덜 해져서 문고리를 돌리는 것조차, 머리끈을 묶는 것조차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다. 거기에 아이는 모유수유를 해서 시시때때로 허기지고 배가 고파오는데 밥 해줄 사람이 없다 보니 먹을 수 있는 것은 신랑이 한 번씩 끓여주는 미역국으로만 배를 채워야 했고, 배가 고플 때는 참치캔에 계란프라이가 유일한 반찬이었다. 그렇게 100일여를 지났을 무렵 나는 아이를 재우고 숨이 쉬어지지 않아 가슴을 쥐고 쓰러졌고, 그렇게 같은 증상으로 응급실행만 3번을 했다. 결과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상이어서 3번 방문한 응급실에서 나는 그 흔한 수액조차 맞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병원에서도 어떠한 도움을 받지 못하자 나의 공포심과 두려움은 더 커져만 갔다. 이러다가는 아이를 돌보기 이전에 내가 먼저 어떻게 될 것만 같았다. 심장이 조여 오고 숨이 쉬어지지 않은 경험은 처음이어서 그러다가 정말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신랑과 나는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했고, 그리하여 우리는 '역이민'이라는 쉽지 않은 선택지를 골랐다. 아이를 키워야 했고, 무엇보다 내가 살아야 했기에 그 당시 그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 안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5개월 된 아이를 데리고 집을 정리하고 하기엔 처분에 가깝게 살림살이들을 처분하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뉴질랜드 출산에 관한 자세한 글은 브런치북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뉴질랜드 이야기'에 자세히 적었습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realnzpart1 )
그렇게 우리 세 식구는 한국에 와서 18평짜리 작은 오피스텔이 보금자리를 틀었다. 잠깐 머물 것이 아니었기에 가족의 집에 같이 지낼 수 없었다. 얼마나 있을지 어떻게 뭘 하며 돈은 벌어야 할지 그 어떤 것도 명확한 것이 없었다. 한국 오기 전에 주문해 놓은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인 방 2칸짜리 오피스텔에서 아이의 물건들만 바닥에 늘어놓은 채 한국생활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우리가 사는 곳은 시댁과 친정의 중간 지점에 양가 모두 가까운 거리여서 양쪽 부모님들의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었다. 평일에는 친정엄마가 와서 며칠이고 지내며 아이를 봐주셨고 가끔씩 주말에는 신랑이 아이를 데리고 시댁에 가 있으며 시부모님들이 아이를 돌봐주셨다. 그러는 사이 나는 여기저기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우선 동네 단골 병원에 가서 한국 와서 제일 먼저 맞고 싶었던 링거를 맞았다. 한국에서는 나의 고질병인 속이 좋지 않거나 피곤할 때 가서 한 번씩 맞으면 맞곤 했던 영양제가 왜 뉴질랜드에서는 응급실에 가서도 놔주지 않고 아이를 낳을 때도 출산 중에만 맞고 아이를 낳자마자 빼버리는지 너무 야박스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동안 못 맞은 원을 풀듯 한 주가 멀다 하고 가서 맞았고, 한의원에 가서 진료도 받았다. 병명은 출산 후 극심한 피로와 그로 인한 심신의 스트레스로 인한 산후우울증이었다. 나는 산후우울증은 말 그대로 정신적으로 우울한 증상만 있는 것인 줄로만 이렇게까지 숨이 쉬어지지 않은 공황증세까지 오는 것인 줄은 몰랐다. 산후우울증으로 인한 불면증도 찾아와 몸은 너무 힘든데 잠은 자지 못하는 상태가 되니 괴로움은 극에 달했다. 한약을 몇 재나 복용을 했지만 차도가 나아지지 않았다. 새벽에도 잠을 이루지 못해 결국 수면제까지 복용하며 지냈다. 가장 힘든 건 전신 오한이었다. 온몸이 시려서 침대에 전기장판을 최대로 키고 옷을 두껍게 입고 두꺼운 이불을 덮고 핫팩까지 하고 있어야지만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 침대밖을 나오거나 할 때는 온몸에 핫팩을 둘러야 했고, 간혹 집 밖에 나가야 할 때는 온몸에 핫팩을 다 붙이고 두꺼운 패딩을 입고 나가더라도 한기에 며칠이고 또 누워있어야만 했다. 하필 한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와 5개월간은 거의 회복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누워만 있는 시간이었다. 오한으로 병원에도 가지 못하는 지경이었으니 말도 다했다. 그러다 한 해가 갔고 아이 돌이 다가왔다.
코로나로 인해 양가 부모님들만 모시고 작은 곳을 빌려 아이 돌잔치를 끝냈다. 아이 돌이 지나자마자 미리 등록해둔 집 근처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기 시작했다. 한국행을 결심한 첫 번째 이유는 부모님의 도움이었고 두 번째는 어린이집이었다. 뉴질랜드는 만 3살이 되어야 유치원에 보낼 수 있다. 만 3세가 되어야 정부의 보조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전에 보낼 수는 있으나 보조를 받지 못해 가격이 어마어마하다. 한 달 비용이 웬만한 직업의 월급에 가까웠기에 부모가 둘 다 고소득자가 아닌 이상 3세 이전에 어린이집을 보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 비용이면 엄마가 집에서 아이를 보는 게 비용적으로 낫기 때문이다. 한국은 3살 이전에라도 정부의 보조를 받으며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이도 와 있는 경우가 있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걸음마도 하지 못한 채 낯선 환경에 보내지는 것이 가혹하다 할 수 있겠지만 부모입장에서는 그렇게 보조를 받으며 보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도움이 된다. 특히 나처럼 엄마가 아이를 케어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더욱이 그렇다. 그리고 한국은 저출산 국가이다 보니 보조금이 많이 나온다. 뉴질랜드에 있을 때는 가정 소득에 따라 차등지급되는데 신랑의 연봉으로 우리는 2주에 60불 보조를 받았다. (분유가 45불이었으니 2주에 분유한통 사면 끝나는 정도였다.) 한국은 아이를 낳으면 거주지역에 따라 조금씩 상이하지만 내가 사는 지역에서는 출산 수당, 육아보조수당 등등 해서 한 달에 60만 원가량 보조금이 나왔다. 돌 때까지는 그 수당을 받았고, 어린이집을 보내면서는 그중 20만 원이 어린이집 수당으로 빠져서 40만 원의 보조금이 들어온다. 그렇다 해도 어린이집 비용은 돈이 하나도 들지 않고도 40만 원이나 받는 것이다. 이 금액이 집안의 경제사정에 따라 큰 부분이 아닌 경우가 있겠지만 우리처럼 한 명이 돈벌이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지금까지도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경제적인 것은 정부의 도움을 받아 마음을 놓이게 되었지만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조금은 나아질까 했던 나의 몸상태는 크게 나아지는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나에게 다 맞춰주며 회사일과 육아를 같이 병행해 주었던 신랑도 점점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한국에 온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혼자 아이케어 못하고 있는 게 네가 몸이 아니라 정신이나 심리 상담을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냐며 나의 육체적 상태만이 아닌 정신의 상태에까지 의구심을 보냈다. 사실 나도 답답했다. 한국 와서 치료받고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면 나아지고 건강해질 줄 알았는데 일 년이 지나도 집에서 누워만 있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답답하고 우울했다. 정말 이것이 산후우울증 때문인 건지 아니면 정말 나의 정신상태에 문제가 있는 건지 그중 어떤 거라도 해결이 되어 이 지긋지긋한 무기력함과 우울함을 끝내고 싶었다.
그래도 점차 시간이 지나며 아이 등하원만큼은 내가 하고자 웬만큼 힘들지 않을 때는 엄마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정말 몸이 힘들거나 신랑이 야근이나 출장이 있을 때에만 엄마에게 도움을 청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 그날은 내가 힘들어서 엄마가 와주신 날이었다. 엄마는 아이 하원시간에 맞춰 오셔서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는 내가 더 쉴 수 있도록 조용히 내 방문을 닫아주셨다. 다른 때는 집에 와도 할머니랑 간식도 먹고 잘 놀던 딸이 그날은 집에 와서 '엄마, 엄마.' 하며 나를 찾았다. '엄마 코하니까 할머니랑 놀자.' 라며 엄마가 아이를 달래는 소리가 방문 너머로 들려왔다. 나는 어련히 엄마가 알아서 달래시겠지 하는 생각으로 다시 눈을 붙였다. 그런데 아이는 전과 다르게 계속해서 방문 앞에서 나를 찾으며 한참을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우는 아이가 아닌데 뭔가 이상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문을 열고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았다. ' 미안해, OO야, 엄마 여기 있어.' 아이를 품에 안고 한참을 토닥여주었다. 그제야 아이는 조금 진정된 듯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더 이상 나를 찾는 아이를 둔 채 방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내가 아이에게 무심해있던 사이 아이는 돌이 지나며 엄마의 존재를 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하루의 절반을 누군가가 나 대신 아이를 케어해 준다는 생각에 나의 의무감 또한 같이 져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날이 갈수록 집에는 있지만 자신을 케어해주지 않는 엄마의 부재를 점점 느끼다 '엄마'를 부를 줄 아는 나이가 되자, 그간 쌓여온 엄마의 부재를 그날 하원 후 집에 있지만 나와보지 않고 한 번도 자기를 안아주지 않았던 엄마를 그렇게 찾으며 애달프게 울었던 것이다. 그런 아이를 품에 안고 있자니 가슴이 미어지고 아팠다. 흐느끼며 우는 딸을 안고 나서야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다. 엄마의 존재로 얼른 일어서야 했고, 아이를 위해서 더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으면 안 됐다. 2년이 다되어가는 시간이면 충분했다. 아니 넘쳤다. 진작에 아이를 위해 정신력으로라도 일어났어야만 했다. 그렇게 그날 아이의 나를 애타게 찾으며 울던 울음이 나를 점점 일어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