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해보름 Nov 04. 2023

정신이 나를 깨우는 시간

새벽에 마주하는 나

 새벽독서를 시작한 지 어언 6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중간에 한 달 정도의 공백기가 있긴 했지만 그 기간을 제외하고서도 어느덧 6개월 차가 되어간다. 이미 가족들은 내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가족뿐 아니라 친구나 지인들에게 새벽에 일어나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독서모임을 한다고 하면 반응은 두 가지다.


 우선 가족 포함 나를 잘 아는 (나의 육체적인 상태까지) 사람들은 '네가? 괜찮겠어? 할 수 있겠어? 무리하지 마. '라는 반응이고, 관계가 그리 가깝지 않은 지인들이나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은 ' 어떻게 그 시간에 일어나요? 그게 가능해요? 저는 절대 못해요.'라는 반응이다. 두 번째 사람들의 반응은 나에게만이 아닌 '새벽에 기상하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새벽에 일어나 보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나조차도 그랬고 나 또한 내 평생에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절대 없었던 것이니 말이다.


 첫 번째 관계, 나의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 지인들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지구상에서 나 이외에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니 (엄밀히 말하면, 과거의 나, 과거에 내가 보여준 나의 모습을 잘 아는) 그들의 말은 어느 정도 과거의 내 모습을 토대로 하여 들어볼 만함직하다. (하지만 그들 또한 미래의 내 모습, 내가 나아갈 수 있는 나의 가능성에 대해 알지 못하지 그들의 반응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잣대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괜찮겠어? 네 체력으로 가능하겠어? 잠 많은 네가 괜히 그런 거 한다고 약한 체력 몸 더 상하는 거 아니야?'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이는  나조차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재, 새벽독서를 하며 하루하루 나는 내가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그것은 나의 무의식과 내 주변사람들이 신경 쓰는 나의 '체력'이 아니다. 바뀐 것은 '정신력'이다. 말 그대로 '정신의 힘'이 생긴 것이다. 내가 새벽에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나의 체력이 좋아져서도, 약한 체력을 이겨내고도 일어나고자 하는 강한 의지가 생겨서도, 새벽기상 습관을 통해 무언가를 이뤄보겠다는 대단한 열망과 포부가 있어서도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이 내 안의 어딘가에 잠재되어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느끼기에 내 몸을 깨우는 요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새벽잠이 덜 깨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킬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나의 정신'이었다. 무슨 소리일까? 내 정신이 나를 깨우다니?


 이런 느낌은 처음이라 나도 딱히 뭐라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분명 내 정신이 나를 깨우는 은 확실하다. 특히 이것을 더 잘 느낄 때는 오늘과 같이 몸 컨디션이 별로 좋지 않을 때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저번주부터 갑자기 기온이 내려가며 잘 관리해 오던 소화도 갑자기 되지 않고 몸도 으슬거리며 컨디션이 영 좋지 않았다. 아이까지 감기에 걸려 새벽에 자꾸 깨서 잠을 이루지 못한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보니 아무리 눈을 뜰래도 새벽 2시 3시가 넘어서야 잠든 몸을 2~3시간 만의 수면으로 깨어내는 건 너무나 힘들어 며칠 새벽독서를 빠지기도 했다. 그러다 이번주부터 몸을 움직이며 회복하고자 했고, 어제는 같이 독서모임하는 다른 코치분께 코칭도 받았다. 나는 이 코칭의 힘이 나의 정신의 힘이 보태지는 데 가장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몸이 힘들수록, 정신이 힘들수록 코칭을 받으면 내 안의 나의 힘을 느끼고, 내면의 힘, 나의 정신의 힘이 깨어지는 느낌이다.

 몸이 힘들 때 영양수액을 맞아 온몸에 영양을 공급하여 혈액순환이 돌게 하고 활력을 돌게 하는 것처럼, 정신이 힘들 때 받는 코칭의 효과는 마치 수액을 맞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내 안에 있는 잠자고 있는, 나의 에너지, 나의 본성, 나의 정신을 깨워 그 힘을 다시금 느끼게 하고 그 힘으로 이렇게 아직 회복이 되지 않은 나의 육체를 새벽에 일어나게 하는 정신력의 파워를 보여준다.




 나는 '정신력이 먼저냐, 체력이 먼저냐'는 논리(?)에 무조건 '체력이 먼저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이었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처럼, 신체가 건강해야 정신력도 작용한다고 믿고 지내왔다. 그런데 그러한 나의 생각, 논리가 흔들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정신과 마인드육체를 컨트롤한다고 강하게 믿는 신랑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신랑은 매번 체력 때문에 무언가 꾸준히 하지 못하는 나에게 체력이 문제가 아니고 정신력이 약한 것이니 정신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니 체력이 힘든데 어떻게 정신력으로 버티냐며 맞대응했다. 몸이 힘들 땐 만사 제치고 쉬어야 한다는 나의 철칙대로 몸이 힘들면 일이고 약속이고 뭐든 취소하고 몸이 나을 때까지 쉬곤 했다. (그러나 사실 그렇 해도 그때뿐이지 체력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그러다 신랑이 한 번씩 새벽까지 일을 하고 와서 또 새벽에 일을 나가 며칠씩 잠도 못 자고 야근을 해내는 것을 볼 때면 어떻게 저 힘든 걸 버틸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아, 정신력으로 신랑은 버텨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신랑이 말한 정신력인가 싶으면서 사뭇 대단해 보인 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신랑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고 나에게는 적용하지 못하고 지내왔다.


 그러다 새벽독서모임을 시작하면서 조금씩 '정신이 육체를 이겨내는구나, 정신이 나의 육체를 깨어나게 하는구나.'라는 경험을 하고 있다.


" 우리가 정의나 진실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단지 빛이 우리를 통과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만약 그 빛이 어디에서 오느냐고 묻는다면, 또 만물의 근원인 그 영혼을 들추어내고자 애쓴다면, 모든 철학은 길을 잃은 것이다. 왜냐하면 영혼의 현존(presence), 또는 부재(absence)는 모두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



 요즈음 읽고 있는 에머슨의 '자기 신뢰 철학'에 나오는 글이다. 아직 나는 그가 말하는 영혼의 현존과 부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면서 아주 조금씩 나의 영혼의 존재, 내 정신의 존재가 나와 함께 함을 나를 이끌어 줌을 느끼는 것 같다. 이 느낌을 매번 느낄 수 있다면, 내면의 거대한 우주와 교감을 원할 때마다 할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몹시 궁금해지는 새벽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단순하게 산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