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와서 몇 개월 지났을 때쯤 나는 이유식에서 갓 유아식을 시작한 아이의 음식 재료를 사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로컬푸드마켓에 갔다. 그곳은 매일 2시간 이내의 거리에 있는 농장에서 신선한 재료들이 아침에 들어오고 당일 들어온 재료는 당일 판매하는 신선하고 건강한 콘셉트의 마켓으로 대형마트보다 가격이 조금 비싸긴 하지만 신선한 로컬재료를 바로 먹을 수 있는 데다 과일과 채소의 맛도 좋아서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아이 유아식을 위해 노란색 파프리카와 브로콜리가 필요해서 둘러보고 있었다. 그런데 파프리카가 노란색과 빨간색이 하나씩 들어 있는 것이 한 묶음으로 비닐에 포장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나는 그 앞에서 멈춰 섰다. 같은 색으로 포장되어 있으면 하나 더 사서 조금 많이 만들어 놓으면 되는데 빨간색은 매운기가 조금 있다 보니 아이가 먹지를 못하고 신랑과 나도 파프리카는 그다지 즐겨 먹지 않아 빨간색 파프리카는 우리에게는 전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다 할 수 없이 빨간색과 노란색 파프리카 한 묶음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강제로 구매한 느낌이었다. 가격을 떠나 필요하지 않아 결국은 버려질 재료를 샀다는 것에 대한 찝찝함이었다. 그리고 그 찝찝함은 '과연 색깔별로 하나씩 넣어 묶음으로 포장을 해 놓은 것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것은 생산자를 위한 것인지, 판매자를 위한 것인지, 소비자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보기 좋은 용으로 해놓은 것인지가 궁금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색깔별로 여러 개가 필요한 사람들은 묶음으로 구매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누구나 다 2개, 4개 등 짝수로 필요한 건 아니지 않을까?' 그냥 장바구니에 소비자가 필요한 만큼만 넣어 가져갈 수 있게 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서 브로콜리를 사기 위해 옆 코너로 가니 브로콜리는 그나마 한 개씩 개별 포장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또한 의문이었다. 왜 집에 가면 바로 쓰레기통에 버려질 포장비닐과 금박띠로 굳이 하나씩 포장을 해놓아야 하는지 말이다. 이곳에서 신선한 재료를 사는 것은 좋지만 이곳의 모든 과채류들이 다 소포장이 되어 있어 살 때마다 왜 내가 필요하지도 않은 비닐과 금박지, 플라스틱 용기까지 같이 사야 하는 건가 하는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대형마트에 가보아도 사과나 오렌지, 감자나 고구마 같은 몇 가지 딱딱한 과일과 채소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과채류들이 소포장되어 있는 것들이 많았다. 생산자와 판매자의 입장에서 과일과 야채는 신선식품이나 보니 사람들이 많이 만져 물러지거나 상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의도로 포장을 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러나 쉽게 물러지거나 하는 식품이 아닌 것들도 한 개씩, 두 개씩 소포장되어 있고 그것도 플라스틱 케이스에 한번, 비닐에 한번 해서 두 번씩이나 포장이 되어 있는 것들을 보면 굳이 왜 이렇게까지 포장을 많이 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물건들을 집을 때마다 내가 대단한 환경운동가가 아님에도 지구에게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었다. 이는 장을 본 후 집에 오자마자 바로 버려지는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더 강한 죄의식으로 다가왔다.
개별 혹은 작은 단위로 소포장되어 있는 채소들
한국에 와서 지내며 뉴질랜드와 다른 굉장히 편리한 것 중에 하나를 꼽자면 당일 배송, 새벽 배송되는 한국의 빠른 배송시스템이다. 아이랑 같이 있으면 아이를 데리고 장을 보러 나가기도 쉽지 않을 때가 많은데 아이물품이며 생필품, 식료품까지 모두 온라인으로 쇼핑하고 하루 만에 받아볼 수 있는 편리함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한국에 와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로 온라인 쇼핑을 했다. 그런데 온라인 쇼핑에서도 큰 마트나 상점의 쇼핑은 여러 개를 시켜도 한꺼번에 오기도 하지만 당일배송, 새벽배송되어 많이 이용하는 곳은 여러 개를 시켜도 각각 물품이 비닐이나 종이 상자에 따로따로 포장에 되어서 배송이 되었다. 마트에 직접 가지 않고 전날 주문하면 바로 다음날이면 받아볼 수 있는 편안함에 이용했던 배달 서비스들이 작은 물건 하나도 종이박스나 비닐에 포장이 되어 오는 것을 보고 나서는 편리함을 위해 이렇게 많은 버려지는 쓰레기들을 배출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이 또한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뉴질랜드에서는 물건을 시켜도 몇 주 혹은 몇 달을 걸려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마트에서 물건을 사서 배송시킬 수 있는 것 정도이기에 그곳에서 지낼 때는 뭐든 직접 사러 다녔다. 집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배송을 시키는 편리함은 없지만 그만큼 자연에게 피해를 준다는 죄의식 또한 별로 없었다. 물건을 사는 것이 상대적으로 적으니 쓰레기도 적었고, 마트에서 물건을 사더라도 많은 것들이 내가 필요한 만큼만 사서 따로 비닐이나 아니면 에코백에 넣어가지고 오면 되었기에 버려지는 포장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의 수가 많지 않았다.
살아보니 한 곳은 사람이 불편하지만 자연에게 이로운 '자연친화'적인 나라이고, 한 곳은 인간의 편리함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편리지향'적 나라였다. 자연친화의 나라에 있을 때는 불편함을 호소했고, 그러다 다시 인간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나라에 와보니 편리함 뒤에 자연이 피폐해져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자연친화'라는 것은 사람이 그만큼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을 말한다. 반대로 인간이 편리하려면 상대적으로 자연과는 멀어지게 되고 자연이 그만큼의 폐해를 감수해야 한다. 어디든 정이 있으면 반이 있고, 좋은 것이 있으면 안 좋은 면이 같이 공존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그러하다. '과연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을까?' 인간이기에 모든 불편함을 감수하며 자연 친화적으로만 사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양립, 공존, 균형이 필요하다.아니 지금은 너무 늦어버려 균형을 이루려면 인간이 모든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지 모른다. 그간 인간을 위해 자연이 모든 폐해를 겪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