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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보름 Dec 03. 2023

아직도 이렇게 야근을 하는 곳이 있다고?

휴일에는 쉬게 해 줘야지요!

 뉴질랜드에서 한국으로 이주하는 데 있어 신랑이 가장 걱정했던 건 한국에서 일자리를 바로 구할 수 있는지 여부였다. 20대 갓 대학교를 졸업한 취업준비생들도 취직하기가 어렵다는데 한국에서 학력도 경력도 없는 뉴질랜드 교포인 신랑이 직장을 구할 수 있는지와 일을 구한다 하더라도 뉴질랜드와 근무환경과 직장문화가 다른 한국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가 가장 큰 관심사이자 걱정거리였다. 걱정을 하는 신랑과 달리 나는 말도 안 통하는 외국에서도 일자리 구하고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 다른 나라도 아닌 고국인 한국에서 충분히 일을 구할 수 있을 것이고, 혹여나 일하던 분야에서 일 구하는 게 어려우면 신랑의 학벌과 영어실력으로 영어라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신랑을 설득했다. 준비성이 철저한 신랑은 혹여라도 본인이 하던 분야의 일을 못 구하게 될 경우를 대비해 영어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테솔 자격증과 영어공인 시험 자격증도 미리 따놓으며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하였다.


 그렇게 우리는 한국에 도착했다. 도착한 지 한 달 정도가 지난 후부터 신랑은 일자리를 아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낼 수 있는 곳이면 가리지 않고 지원을 하던 신랑은 어느 날 신랑이 일하던 분야의 회사에 자리가 나서 지원을 했고 면접을 보러 간다고 했다. 신랑은 뉴질랜드에서 영상제작과 촬영을 전공하고 영화와 드라마 촬영 쪽에서 일을 해왔었다. 한국에서는 그쪽 분야의 일을 구하려면 서울에 일자리가 가장 많았고 우리가 있는 광역시에는 아무래도 일자리가 적어 구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도 영상촬영과 제작 쪽 일을 할 수 있는 회사에 면접을 보고 왔다고 하니 다행이다 싶었다.


" 어땠어?"

" 회사는 어떤 것 같아?"


 " 응 나쁘지 않은 거 같아."


" 어, 그래? 그럼 출근은 언제 부터하는거야?"


" 다음 주부터 간다고 했어."

 

 출근일이 다가와 출근은 어디로 하는지, 출근날 몇 시까지 어디로 오라는 연락은 받았는지 묻자, "아니, 그냥 가면 되지." 라며 신랑은 짧게 일축했다.


 보통은 '출근날 몇 시까지 어디로 오세요.'라든지, '어느 부서 누구를 찾아오라는지.' 등의 알림을 주지 않나? 그래도 한국에서 회사경력이 10년 가까이 있는 나는 뭔가가 찜찜했다. 그러나 항상 뭐든 좋게 좋게 생각하는 초긍정주의 신랑의 한국에서의 첫 직장과 첫 출근을 더 이상 방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아 잘 다녀오라고 하며 첫 출근을 배웅했다.




  그렇게 첫 주는 예상과는 달리(?) 별 탈없이 무난하게 지나갔다. 그렇게 늦게 끝나지도 않았고 주말에도 쉬었으며(이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 줄은 그다음 주부터 알게 되었다.) 일이 그렇게 바빠 보이지도 않았다. 6시에 대략 퇴근 준비를 하고 집에 6시 반에서 7시 정도에 도착하니 이 정도면 딱 좋다 싶었다. 그러나 2주 차에 접어들며 점점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 늦어지면서 평일에 7시 이전에 집에 들어오는 날이 거의 없었다. 보통 10시에서 11시, 출장을 다녀올 때는 새벽에 들어왔다. 야근도 야근이지만 출장이 잦았다. 업무 특성상 출장이 많이 있다는 것은 신랑도 예상을 하고 나도 신랑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출장이 많아도 되나 정도로 일주일에 3~4군데씩 출장을 갔다. 월요일에 야근을 하고 저녁 10시에 퇴근하고 화요일에도 야근을 하고 바로 2박 3일 서울 출장을 다녀오고 새벽에 도착해서는 2~3시간 눈을 붙이고 다음 날 새벽 다른 곳으로 출장을 갔다. 그리고 저녁에 도착해서 또다시 서울출장 1박 2일, 그렇게 5일간 3번의 출장을 갔다가 금요일 10시가 넘어서야 집에 들어왔다. 5일 동안 집에 와서 잔 건 2번 그마저도 새벽에 와서 3~4시간 눈만 붙이고 나간 게 전부였다. 아이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주말엔 쉬게 해 주셔야죠!


 야근과 출장만 있다면 그래도 참았을 거다. 주말엔 쉴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으니.. 그러나 언젠가부터 주말에도 일이 있다고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두 번 있는 거겠지 했는데, 한 두 번이 아 심지어 토요일, 일요일 이틀 내내 일을 나가서 하루도 못 쉬는 날도 많았다. 그럴 때면 주중에 하루 쉬게 해주지 않을까 했는데 그마저도 없었다. 주중엔 주중대로 일이 많아 쉴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평일엔 야근과 출장으로 주말에 쉬지 못한 지 한 달이 넘어갔다. 다행히 신랑은 예상했었다는 듯 크게 내색은 하지 않으면서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지만 나는 점점 지쳐갔다. 산후풍과 산후우울증 증세로 치료를 받으며 가족들 도움을 받고 있긴 했지만 가족과 같이 사는 게 아니다 보니 도움을 받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신랑이 집에 들어오는 날이 한 달에도 손을 꼽다 보니 혼자 버티는 게 쉽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물어보니 반응들이 다르긴 했지만 한국은 아직도 야근을 그렇게 하는 곳이 있다고 했다. 막연히 요즈음에는 워라밸을 다 지키면서 일할 수 있을 거라 각한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다.


 그래도 이건 아닌 듯싶어 직접 알아보근로기준법에 주 52시간 이상은 일할 수 없게 되어있었다. 그런데 내가 계산하고 적어놓은 신랑 출퇴근일지만 보아도 52시간은 족히 넘고도 남았다. 그리고 그렇게 일하면 시간 외 근무수당을 맞게 주어야 하는데 월급명세서를 보면 일한 시간에 비해 턱없이 적은 시간이 시간 외 근무수당으로 포함되어 있었다. 신랑 근로계약서를 꺼내 꼼꼼히 살펴보았다. 법정 근로시간인 주 40시간을 초과한 경우 사전에 회사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고 나와있는데 이건 승인이 아니라 암묵적 강제에 가까웠다. 그리고 계약서 상 주휴일은 일요일만 명시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법정 근로 시간 (1일 8시간, 주 40시간)이라고 나와있고 이것은 주 5일을 말하는 것인데 토요일은 주휴일로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일요일 휴일을 부여함에 있어서도 업무상 부득이한 경우는 24시간 전에 미리 주지하고 협의하여 다른 날로 부여한다고 되어있지만 일요일에 일을 하고 대체로 다른 요일에 쉰 적은 거의 없었다. 이것저것 알아보고 나서 신랑에게 이건 뭔가 너무 부당한 것 같다고 이야기하니 신랑도 그제야 회사가 시스템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고 이야기를 했다. 일은 많이 벌려놓는데 그에 반해 일을 제대로 처리할 직원들을 배치하지 않고 그마저도 직원들이 과도한 업무로 그만두어 남은 사람들이 그들의 몫까지 떠안게 되면서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한 명, 한 명이 어마어마한 업무량을 소화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야근을 하는데도 수주를 맡은 일을 제때에 처리하지 못해 업체로부터 컴플레인을 받는 실정이라고 했다.


 이제야 처음에 내 촉이 이상한 게 맞았던 듯싶었다. 아무리 중소기업이라지만 뭔가가 처음부터 제대로 잡혀있지 않은 느낌이 나름 대기업 8년 이상 다닌 나의 눈에 어딘가 이상해도 이상하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코로나 격리 기간은 정부가 정한 아닌가요?


 그래도 다른 방도가 없어 하루하루 야근과 출장으로 1년 같은 6개월을 다니던 차에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일이 발생했다. 코로나가 한참을 무렵 집에 아직 돌도 안 지난 아이가 있고 신랑은 여기저기 출장을 많이 다니는 지라 회사에서 직원들과 밥 먹을 때 따로 먹으라고 하고 출장을 가서도 꼭 마스크를 쓰라고 당부를 했는데, 신랑은 한국회사 일하면서 그렇게 하기는 어려운 눈치였다. 뉴질랜드에서는 식사는 각자 따로 먹는 문화이다 보니 그럴 염려는 덜했는데  한국은 식사는 아무래도 같이 하는 문화이다 보니 아무리 코로나가 유행한다 해도 혼자 따로 밥 먹고, 출장 가서도 혼자 따로 먹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던 차에 어느 날 같이 출장 갔던 직원이 코로나에 걸려 자기도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했는데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우려하던 코로나에 걸린 것이다. 비상이었다. 아이를 친정집에 보내고 아직 증상이 없는 나는 신랑과 같이 있되 신랑을 안방에 격리했다. 평소 건강해서 크게 아프지 않고 지나갈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신랑은40도 가까운 고열과 찢어질듯한 목통증으로 너무 힘들어했기에 옆에서 케어를 해주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차려서 방에 넣어주고 간식도 챙겨서 넣어주었다. 그런데 밖에 있는데 이상했다. 목이 칼로 찌르는 것처럼 너무 아프다는 신랑이 계속해서 통화를 하고 있고 열이 40도에 육박하는데도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아픈데 뭐 하는 거냐고, 약 먹고 좀 쉬라고 하니 신랑은 일해야한다고 했다.


 " 뭐. 라. 고? 코로나 걸려 열이 40도 인 사람이 일을 한다고?"


 코로나가 심각단계가 완화되면서 부터는 격리도 권고로 바뀌고 코로나에 걸리더라도 격리를 하지 않게 되었지만 초기에는 일주일 이상 격리가 필수였었고, 신랑이 코로나에 걸려 격리를 하게 된 것도 그 시기였다. 그런데 격리 중에 회사에서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예외적인 경우도 있으니 많이 양보해서 회사 상황에 따라 정말 급한 경우에는 격리중이다 하더라도 일처리를 부탁하여 한다 하더라도 그것도 사람의 컨디션을 봐가며 일을 시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건 코로나로 확진되고 증상이 가장 심한 첫 날부터 출근만 안 했다 뿐이지 똑같이 집에서 근무시간에 일을 다하고 있었다. 그렇게 신랑은 격리기간 내내 꼬박 주말을 제외하고 집에서 업무처리를 해야했고, 약 먹고 자려고 누우면 걸려오는 전화에 눈도 못 붙이고 깨야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고, 격리가 격리가 아니었다.


 속상한 마음에 직접 대표에게 전화해서 아픈 사람을 이렇게 일을 시켜도 되는지 따져 묻고 싶은 마음 몇 번이나 들었다. 한국 와서 몸 다 상하겠다며 그만두고 다른 곳을 찾아보라는 가족들도 한국은 아직도 그런 곳이 많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개인이 회사를 상대로 이야기를 하거나 문제를 제기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니 회사의 그런 업무강도가 싫으면 그만두던지 아니면 다닐 거면 큰 트러블 만들지 않고 다녀야 한다며 문제를 제기하려는 나를 단념시키려는 듯 보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회사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다니고 있었다.




 

 내가 한국에서 회사를 다닌 지 10년 가까이 지났다. 나는 무언가 그때보다 직원들의 복지와 자율성이 존중되고 워라밸이 지켜지는 문화로 많이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중소기업이라지만 이렇게 말도 안 되게 직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제대로 된 근로기준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회사를 운영하는 곳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고 그런 곳에 신랑이 다니게 될 줄도 상상하지 못했다. 직원의 복지를 생각하지 않고 회사의 이윤추구만을 위해 직원을 일하는 기계처럼 부리는 그곳에서 신랑이 당장이라도 나오길 바랐다. 그러나 현실적인 신랑은 다른 곳도 이쪽 분야는 비슷할 거라며 그래도 1년은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더 심한 곳은 이렇게 일하고도 월급도 제때 주지 않는 곳들도 있는데 그래도 여기는 일강도는 높아도 월급은 제때 주니 하는데까지 해보겠다며 그만두라고 하는 나를 오히려 설득했다. 한국에 와서 일한지 1년도 안된 신랑의 이런 반응에 나는 놀라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힘듦을 버텨줌에 고맙고 미안했다. 그러나 그나마 우리를 버티게 해준 월급조차 제때 주는 것도 곧 지켜지지 않게 되더 이상 그곳에서 버틸 이유가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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