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나는 '원칙주의자'였다. 딱히 누군가가 그래야 한다고 가르쳐주지는 않았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 학교 다니면서부터 알게 된 규칙과 규범이 학교뿐 아니라 사회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선생님과 어른들을 통해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배운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유독 그것들을 지키고 따랐다. 초등학교 때 나의 아빠는 말한 것을 바로바로 지킨다 하여 나를 '컴퓨터'라고 부르셨다. 어릴 때였는데도 그렇게 불러주시는 것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았다.
이런 나의 성향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 엄마와의 쇼핑약속이었다. 초등학교 때 엄마는 어느 주말에 언니와 나와 함께 쇼핑을 하러 가자고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백화점 보다 보세 옷가게가 많은 지하상가로 쇼핑을 다니곤 했는데 막상 쇼핑을 가면 두 살 터울의 언니옷만 주로 사주었는데도 왜 그렇게 쇼핑을 하러 가는 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엄마가 말한 그날만을 기다렸고, 그 주말이 왔을 때 웬일인지 엄마가 준비하지 않고 계셔서 엄마를 재촉했다. 그러자 엄마는 (내 기억으로는 아프셨던 건 아닌 것 같고 피곤하셨던지 아님 귀찮으셨던지 둘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오늘 엄마가 피곤하니 다음에 가자고 하셨다. 그날만을 기다린 나에게는 청천벽력이었다. 그 당시 나의 눈에도 엄마가 쇼핑을 못 갈 만큼 심하게 아파 보이지는 않았었는지 나는 엄마에게 '오늘 가기로 했는데 왜 안 가느냐'라고 계속 재촉하고 졸랐다. 몇 번을 조르자 엄마는 짜증이 나셨는지 가기로 했어도 못 갈 수 있는 거라며 언니는 이해를 하는데 너는 왜 이해를 못 하느냐며 핀잔을 주셨다. '약속을 하고 지키지 않은 사람은 엄마인데 왜 엄마가 화를 내고 내가 핀잔을 들어야 하는지'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고 뭔가 부당하게 느껴졌다. 어른이 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사정이 있는 경우 약속을 못 지킬 수는 있지만 그럴 경우라면 적어도 약속을 한 사람은 짜증과 핀잔이 아닌 약속을 못 지키는 이유를 설명하고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다음에 다시 가자든지, 대신 다른 것을 하자든지 하는 등) 이라든지 그조차도 되지 않을 때는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표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당시 나의 엄마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나에게는 약속이 쉽게 지켜지지 않을 수 있고 그에 대한 어떠한 보상이나 미안함의 표시 또한 없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라면서 나는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 것뿐 아니라 지켜지지 않을 때에 사람들이 뻔뻔할 수 있다는 것과 아무렇지 않게 오히려 당당할 수 있다는 것에 더 크게 놀랐다. 그리고 약속을 끝까지 지키려고 하고 지켜야 하는 게 맞는 거라고 말한 사람이 오히려 바보취급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성인이 되어 사회에 나와보니 더 가관이었다. 다수가 같이 사는 아파트에서 공공질서의 규범을 어기고, 차를 적법하지 않은 곳에 마구잡이로 주차를 하고, 심지어는 장애인표시나 다른 정해진 차들만 주차할 수 있는 곳에 아무렇지 않게 주차하여 해당 사람들이 피해를 보게 하고, 교통법규를 어기거나 정해진 곳에 쓰레기를 버리지 않고 투기하고 재활용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다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오히려 소소한 것들 일지 모른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곳에서 더 큰 편법과 사기들이 일어난다. 학교에 있을 때 우리에게 규칙과 규율을 잘 지켜야 한다고 말하던 어른들이 규칙을 어기고 편법을 행하고 그 편법을 많은 사람들이 따르다 보니 오히려 편법이 법인 듯 보이는 사회였다. 헷갈림을 넘어섰다. 그리고 다들 그러니 그렇게 살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주위사람들을 보면서 '그래 혼자만 튀어서 뭐 해, 다들 이렇게 사는데.' 라며 나 스스로와 점점 타협을 하게 되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안 그래도 학창 시절과 사회에 나와 직장을 다니며 독특하고 유별나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살았던 터라 이제는 그런 시선들이 나도 달갑지 않았던 것이 이유라면 이유일까?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혼자 힘들게 나의 방식, 아무도 지키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는 것이 나뿐 아니라 함께 있는 주위사람들까지 피곤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사는 곳에 적응하고자 나를 조금씩 바꿔갔다. 불법이 아닌 선에서 교묘하게 남들처럼 편법을 행하고, 남들도 다 그렇게 한다는 것으로 다들 그렇듯 나 또한 그런 나 자신을 위안하고 합리화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나는 점점 '원칙'에서 벗어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편법이 통하지 않는 나라
내가 살던 곳에서 벗어나야 내가 살았던 곳이 어떤 곳인지 제대로 보이는 법. 30여 년이 넘게 살던 곳에서 벗어나 새로운 곳에서 살다 보니 내가 살던 곳이 원칙을 따르지 않는 사회였음을, 그렇게 살아도 누구 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는 너도나도 원칙에서 벗어난 눈앞의 편안함만을 따르는 사회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 적응되어 나 또한 그들 중 하나로 살아왔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짐을 경험하게 되었다.
내가 이민 와 살았던 나라는 말 그대로 편법이 통하지 않는 나라였다. 사정을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는다.
원칙과 정해진 규율에서 벗어난 것이면 어떤 누가 와서 어떤 수를 쓰고 어떤 사정을 해도 안된다.
' 나 어디 누군데~'와 같은 사회직급, 권위, 계급 따위 모두 원칙 앞에 힘을 쓰지 못하는 나라이다.
공권력이 강하다. 경찰 앞에서 '나 누군데.'가 통하지 않는다. 경찰이 무서운 나라다.
내가 겪었던 일이 생각난다. 처음 임신했을 때 처음으로 아기집을 보는 초음파를 찍으러 가야 하는데 서류를 준비해줘야 하는 미드와이프가 서류가 아직 준비가 안되었으니 우선 서류 없이 가라고 했다. (참고로 당시 미드와이프는 한국인이었다.) 뭔가 찜찜했다. 미드와이프가 적어준 서류가 있어야 하는데 없이 가라니. 그래도 어떻게든 자기가 이야기를 할 테니 가라고 해서 나는 초음파 찍는 곳으로 갔다. 역시나 나의 예상대로 초음파 찍는 곳의 데스크 직원은서류를 미드와이프가 보내주어야 초음파를 찍을 수 있는데 지금 너는 서류를 갖고 있지 않으니 찍어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미드와이프 말대로 나의 미드와이프가 지금은 바빠 이따 오후에 보내준다고 이야기를 전하니 그러면 이따가 미드와이프가 서류를 보내주면 그때 촬영을 해준다는 것이다. 미드와이프가 말한 대로 이야기했지만 통하지 않자 그녀가 직접 전화로 그들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답은 안된다였다. 원칙 앞에 단호한 그들 앞에 난 부끄러워졌다. 원칙이 아닌 편법으로 나에게 부탁을 하라고 한 프로페셔널하지 못한 그녀의 태도에 몹시 화가 났다.그들 사회에 살면서 나는 다시금 원래의 원칙을 따르는 나의 모습이 맞음을 원칙을 따르는 사회가 불편한 사회가 아니라 그것이 맞는 사회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원칙에 따르는 모습은 뉴질랜드 곳곳에서 볼 수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주차를 할 때에도 자리 있는 곳에 그냥 주차하려다가 그곳에 사는 로컬주민들에게 한 소리 듣는다. 절대 주차구역 이외에 주차하면 안 된다고. 안 되는 것은 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편법으로 그냥 안 되는 곳에 주차를 하고 대다수가 그 편법을 따르니 법을 지키는 사람이 바보 되고 그것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니 법을 따르는 사람만 바보가 되었다. 그러나 여기는 달랐다. 법이 강했다. 아닌 곳에 주차를 하면 바로 토우 되든지 엄청난 벌금이 부과된다. 편법이 절대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법을 어길 시 그에 대한 대가가 바로 일어난다. 그런 곳이다 보니 사람들이 편법을 행하지 않게 된다.
준법정신이 강한 시민
사회는 사회 구성원들로 이루어진다. 법이 강하고 법을 따르고 법을 지키는 나라는 사회 구성원들도 다르다. 그들 자체가 '법'이 되고 그들 자체가 '규범'이 된다.
어느 바닷가에서 조개를 줍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네 주민인듯한 분이 나오더니 여기서 그 작은 조개를 주우면 안 된다면서 표지판에 나온 규범을 보라고 했다. 그 표지판에는 우리가 잡고 있는 조개를 잡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신랑도 예전에는 잡아도 됐었는데 지금은 법이 바뀐 거 같다며 이야기했고, 우리는 몰랐다고 이야기하며 다시 잡은 것을 내려놓았다. 이뿐 아니다. 한 번은 쇼핑몰에서 주차를 하다 주차되어 있는 옆차를 살짝 부딪힌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내가 낸 접촉사고에 놀란 것이 아니라 순식간에 나를 둘러싼 사람들에 의해 놀랐다. 내가 차에서 내려 상대방의 차를 확인하려고 하는데 순식간에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더니 '네가 이 차를 부딪힌 것을 봤으니 이 차주인이 나올 때까지 어디 가면 안 된 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도 당연히 그 차를 확인한 후에 주인이 나오는 것을 기다리고 늦게 나오면 나의 연락처를 적어놓고 오려고 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나도 기다리려고 했다고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그들은 그 차 주인이 나올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것이 아닌가? 조금 후에 차 주인이 나오자 그들은 그 차 주인에게 나를 가리키며 내가 너의 차를 박는 것을 자신들이 보았으니 필요하면 목격자 진술을 해주겠다면서 연락처를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오지랖 깊은 태도에 나는 황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냥 가려고 한 것도 아닌데 나를 뺑소니로 모는 듯한 태도들에 기분이 나빴다. 그러나 지나고 생각해 보니 내가 그 사고를 당한 운전자 입장이라면 법의 입장에서 혹시라도 뻉소니를 칠 수 있는 사람을 그들이 잡아준 것이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참 뉴질랜드 사람들의 준법정신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속한 커뮤니티에 이롭고 도움이 되는 것을 굉장히 자부심 있게 생각한다.그들은 스스로가 사회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고 법을 어긴 사람이 있으면 그들 스스로 그들 사회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위해 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을 바로 잡아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시민들이 있기에 그들이 속한 사회는 평화롭고 안전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공권력을 지닌 소수의 집단과 소수의 사람들만이 사회를 지키는 것이 아닌 그 사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법을 지키고 원칙을 지키며 그들이 속한 사회를 바르고 안전하고 깨끗한 곳으로 만드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나도 그들과 같은 시민으로서 살고 싶어졌다. 그러다 보니 나부터 우선 규범을 잘 지키게 되었다. 무언가 다시 제대로 된 질서의 톱니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니 내가 오랫동안 살아온 사회는 아니지만 이 새로운 사회에 나도 속해있다는 무언가 더 강한 소속감과 자부심이 들었다. 그리고 이것이 올바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다했을 때의 소속감과 자부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칙'이 왜 중요한가? '법'과 '규범'이 왜 존재하는가?'원칙'은어떤 행동이나 이론 따위에서 일관되게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규칙이나 법칙을 말하며 그것은 그것의 정의대로 일관되게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어느 때에만 지키고 어느 때에는 지키지 않고 누구는 지키고 누구는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내가 속한 사회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사회구성원 모두가 지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는 혼돈과 무질서가 난무하고 점점 더 사람들이 법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사회는 점점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강한 페널티가 주어져 법을 따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 사회에서 공권력을 가진 기관과 공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법이 있되 지켜지지 않고, 지켜지지 않아도 큰 문제가 없다면 분명 그것이 이상하고 잘못된 것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 당신은 '원칙이 잘 지켜지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아니면 '원칙 대신 무질서와 편법이 난무한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그에 대한 답 속에 당신의 행동이 들어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