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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양이삼거리 Feb 06. 2022

배춧국

겨울이면 생각난다.


  중학교 때 친구 따라갔던 지역 청소년 모임에서 학교 선생님들과 겨울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 선생님 한 분과 대여섯 명씩 조를 짜서 전라도 여행을 갔다. 그즈음 나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책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코스를 짜고 답사 갈 곳 조사도 하고, 지금 생각해도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조별로 움직이다가 마지막 날은 한 곳 숙소에 모였다. 어디였는지 모를 아궁이와 부엌, 넓은 마당이 있는 곳이었고, 그날은 촘촘히 수많은 별들을 처음 올려다본 날이었다. 탄성을 지르며 같이 보았던 친구가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한문 선생님은 부엌에서 밀가루 반죽 바른 배춧잎을 넓은 솥뚜껑 위에다 부쳐내고 있었다. “이걸 먹는 건가요?" 라는 내 질문에, “먹을 게 없어서”라는 대답을 하며 배추전을 만들었다. 내 질문도 잘못되었고, 대답도 잘못되었던 것 같다. 그 하얗고 넙적한 배춧잎을 또 하얀 밀가루 반죽을 더해 기름에 부쳐낸 그것은, ‘정말 먹을 게 없어서 인가.’라는 생각을 중학생 나에게 심어주었다. 그럴법한 것이, 일단 맛을 보지 못했었고, 제사와 명절에, 또는 김치나 호박을 썰어 넣고 부쳐내는, 집에서 보던 것과 사뭇 다른 밍숭맹숭한 것이었고,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고, 노릇하게 부쳐지지도 않은 하얀 부침의, 요리실력의 차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한 20년 즈음 지난 후 나는 그 배추전을 뜬금없이 영화에서 맞닥뜨렸다. '리틀 포레스트' 혜원은 얼은 밭에서 캐낸 배추로 성큼성큼 된장국을 끓여 첫 장면부터 놀라게 하더니, 배추전으로 또한 번 놀랐다. 바삭하게 구워낸 배추전. 우리는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서, 어렵게 배추 한 통을 산 후, 잎을 따 맑은 밀가루 반죽을 입힌 후 접시에 한 잎 담아내었다. 바삭한 튀김옷을 유지시키며 젓가락으로 결을 따라 찢어 간장을 찍어 먹었다. ‘이건 또 다른 달달함이구나.’


 나눔 텃밭에 여름이 지나면 배추 모종을 나눠주어 우리는 늘 배추를 심었다. 그런데 이 배추라는 놈은 여름 철 상추처럼 쑥쑥 그냥 자라는 게 아니어서, 심는 시기도 굉장히 중요하고, 잎을 잘 묶어주는 일도 중요한, 정성이 필요한 까탈스러움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텃밭 시작한 첫해가 (부지런하게 지킬 것을 지킨) 지금 생각해보면 제일 잘 되었고, 점점 우리의 자유스러운 농법에 맞춰 딱 그만큼 자라주었다. 그래서 김치를 담그기에는 애매한 배추들을 얻었고, 밀푀유 나베를 한 냄비 해 먹고 나머지는 김치를 담그는 기술을 가지신 분들께 나눠드렸다. 그러던 중 영화에 나온 배춧국과 배추전은 정말 놀라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배추라니, 배추는 김치재료가 아니던가.. 사실 힌트는 여기저기 있었다. 샤브샤브에 배추, 가끔 중국집 짬뽕 국물에 배추, 엄마가 해주던 배추 된장국. 하지만 이렇게 배추에 대한 눈을 틔었다고 할 밖에. 그 후에는 대만식 음식점에서 먹은 배추 볶음(이제 집에서도 종종 해 먹는), 밀푀유 나베보다는 배추와 돼지고기, 야채 등을 넣은 돈지루, 그리고 닭 배춧국 등 요리의 폭이 넓어졌다.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이 배춧국에 있다.


 요리 실력이 해를 보내며 아주 조금씩 늘고 있는 요즘, 육수를 내는 방식에 나의 방법을 가지게 되었다. 단순한 재료들을 유지하기 때문에, 고기 국물이 필요하면 양지를 한 근 푹 삶아내고, 멸치 육수가 필요하면 좋은 멸치를 듬뿍 넣고 우려낸다. 이것이 기본이다. 기본 재료들의 맛을 충분하게 낸 후에, 시원하고 청량한 맛이 필요할 때는 기본이 흔들리지 않을 정도의 무 혹은 파를 적당히 넣는다. 간장 약간 그리고 소금으로 간을 한다. 이 정도면 우리 집 식탁에서 충분하다. 잘 모르는 무언가를 자꾸 넣어서 이도 저도 아니게 오히려 맛을 두루뭉술하게 만들기보다는 확실한 자연 재료 맛을 풍성하게 만들어내는 게 내가 찾은 방법이다. 그리고 이 방법은 당연하게 통한다. 멸치, 고기의 본래 맛이니까. 닭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집 닭백숙은 닭과 마늘, 대추 두 조각, 파뿌리 한 개로 만든다.  그래서 이 듬직한 기본 육수에, 그날의 날씨와 점심에 먹었던 음식들과 기분 상태를 반영하며 된장을 살짝 넣어보기도 하고, 김치를 한 조각 넣어보기도 하고 오늘은 그런 날이지 하며 소금만으로 간을 하는 그때그때의 요리를 하고 있다.


 이 방법으로 돈지루에 도전했다. 종종 된장 맛이 강해서 고기 넣은 된장국 마냥 먹는 날이 있었는데, 채소들과 돼지고기를 충분하게 익힌 후 간을 하고, 된장을 마지막에 살짝 풀어서 묘한 신경전이 유지되는 상태의 맛을 만든다. 이 방법은 아주 유용했다.

 그래서 더 큰 자신감으로 한술 더 떠 맛있는 배추 된장국을 끓이겠다는 생각으로 멸치육수에 배추를 듬뿍 넣고 끓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된장을 넣으려고 간을 보기 위해 맛을 보았는데, 너무 깜짝 놀랄 맑은 배춧국의 맛을 보게 되었다. 깔끔하면서 시원하고 채소의 쨍쨍함이 있는 맛이었다. 여기서 멈춰도 될 만큼의 한 그릇의 맛이었다. 조금 소심하게 된장을 한티 스푼 넣었다. 한풀 꺾였지만 부드럽고 뜨끈 탄탄한 배춧국이다. 이날 이후 배추는 우리 집에서 엄청난 식재료로 다시 한번 인정받으며 배추 한 통 사는 즐거움을 주고 있다. 배추다. 한 그릇을 먹고 나면 온전히 배추가 주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에너지가 생긴다.


 요리 재료를 알아가고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는 재미는 다른 일들과 연관이 있다. 여러 가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을 떠올리기게 한다. 매일의 식사를 위한 우리의 활동은 매우 직접적이고 일상적이다. 하루에 세 번이나 규칙적으로 일어난다. 가볍다면 가볍고 진지하다면 진지하다. 많은 일상적인 시행착오를 포용하고 기회를 준다. 단, 우리 집에서는 세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세 번 안에 ‘먹을 수 있을 정도의’ 성과가 없으면 그 요리는 사 먹는 음식이 된다. (몇 년 지나 잊을 만 해지면 도전의 기회를 엿본다.) 다른 것들에 비해 너그럽다. 지어진 건축물이란 그럴 것이지. 그러기에 준비해야 할 것들이 남아있다. 맑은 배춧국 이야기는 여기에 맺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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