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하겠습니다.
맑음.
노트, 문구류를 공들여 살피고 구입하는 우리는 본인이 샀으나 집에 돌아와서 써보고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시 다른 이에게 물려주는 냉정하면서 홀가분한 전통이 있다. ( 어쩐지 애매해 보였는데. 우리는 전통도 있고, 가보도 있는 집이다. 한참 물려줄 수 있는 그 '가보'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써보겠다. ) 그렇게 B6 크래프트 단단한 표지를 가진 도톰한 줄노트 하나를 물려받았다.
그곳에 무엇을 쓸까 고민할 때는 영화 '한산' 그리고 여름휴가 '통영', 책 '난중일기'로 이어졌을 때이므로 나는 매일 빠지지 않고 일기를 쓰자, 아무리 바쁘고 특별한 일이 없다 해도 날씨 한 단어라도 꼭 적자라고 생각했다.
나라를 구할 일은 없더라도 이 노트를 살릴 수는 있다. 딱딱하고 거칠어 손에 잡히는 감촉이 매우 이질적이고 절대 길들여지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버려버릴까 생각도 들었지만, 수년간 집 요리로 무엇이 되더라도 만들어낸 경력을 가진 나라면 (적어도 우리 셋 중에서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한참 잊히기도 하고, 드문히 적혔다. 잊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달려들어 다시 토해내고 또 잊었다, 짧은 단어 하나만을 적는 일도. 사실 오늘은 그게 더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된다. 꺼내기 시작한, 하고 싶은 말 많지만 화창한 단어 하나만 남겨 놓는 일. 책상에 앉아 노트와 펜을 꺼내고 지금의 나를 후련하게 해 줄 말이 아닌, 맑고 깨끗한 단어 하나만을 남겨 놓고 노트를 덮는 일, 淸.
연말에 작년 다이어리와 노트를 살폈다, 어떤 한 해를 보냈다. 다이어리에는 일정관리, 할 일, 좋은 글귀, 바꿔나가야 할 것들이 많이 적혀있다. 중요한 내용들은 옮겨 적는다. 그런데 무언가 적고 계획하고 요리조리 맞춰가는 것을 즐기는 나였지만 올해는 예전과는 다르다, 조금 시큰둥하다. 오래전부터 모아놓은 매해 마지막날 한 번씩 다시 보거나 업데이트하는 매거진 타입 다이어리 속 열정적으로 마음을 가지게 하던 나의 생각들에, 수집된 말들에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집중력이 떨어졌다라고 말하는 것은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조금 어설프게 느껴지는 페이지는 보기불편해서 고쳐 적었다. 조금은 변한 것 같다, 바꿔야 할 것들을, 어색함들을 지나치지 않게 살펴보자.
이 와중에 다이어리 속 눈길이 가는 부분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한 일들이 아니라 그 안에 짧게 적힌 ‘피식’한 웃긴 사건들이었다. 당시에는 웃픈, 조금 쓰릿함이 섞인 가벼운 일들이었지만 단어 하나만으로도 생생히 생각이 떠오르는 일, 슬플만한 것은 모두 지나간 얘기들, 그 즐거운 일들. 나 같이 평범한 사람도 별별일이 다 웃긴 여고생과 아무리 진지하게 있어도 웃긴 일이 가만히 두지 않는 남자와 생활하다 보면 어쩔 수 없다. 그런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더 많이 적기로 했다. 우스운 이야기들을. 즐거운 일을 더 많이 기억하자.
그래서 말인데 맑음 만큼 눈에 들어오는 문장이 있었다. '해괴하다.' 이 말은 주로 원균 같은 인물과의 일을 생각하며 쓰신 말이다. 깔끔하다.
이 얼마나 유머러스한 표현인가, 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속으로 되뇐다, 해괴하다. 이 말을 내 해석상에 적절히 쓰면 이렇다. 추운 겨울에 회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왠 얇은 사람이 나의 반대편에서 코트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다가오다가 내가 30도쯤 연, 아직다 열리지 않은 유리문 사이로 몸을 틀어 슬라이딩하듯이 미끄러져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문 손잡이를 잡고 있는 그 순간 내가 떠올리는 말 ' 해괴하다.' 귀여운 수준의 사용이지만,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싸워야 하는 가치가 없는 일이라면 '해괴하다.' 말 한마디를 내뱉고는 툭 털어버리면 좋겠다.
맑음.
해괴하다.
새해에는 이런 가뿐함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