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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 집에 전자레인지를 샀을 때 일이다. 바쁜 부모님에 비해 여유와 호기심이 가득했던 나는 전자레인지의 사용 설명서를 정독했다. 어떤 원리에 의해 작동되며 하지 말아야 할 것, 관리방법 등이 적혀있었고, 부속 기기들을 사용하며 할 수 있는 요리법들도 함께 있었다. 식구들과 꼬지에 끼워 닭구이를 하기도 했고, 쿠키를 굽고 간식 만들기도 했다. 지킬 것만 지키면 그만큼 간편하고 다양한 용도로 쓸 수 있는 기기도 없다. 나의 요리는 전자레인지 설명서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아서 서랍에 넣어두긴 했지만 긴급할 때 쓰면 짧은 시간에 요긴한 결과를 만들어 줄 것이다. 전자레인지는 꾀 믿는 구석이다.
설명서 탐독은 20대 중반 본격 사회생활까지 성실하게 이어졌는데, 그때까지 내 세계에 들어온 매뉴얼들은 요즘의 보험약관 같은 방대함과 모호한 어려움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프로그램들도 단순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필수의,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어서 빠짐없이 분석되었다. 그즈음은 휴대용 전자기기, 프로그램이나 게임 CD의 설명서 같은 것들이었다. 설치방법, 게임의 배경 주요 캐릭터, 아이콘 등이 설명되어 있었다. 그 작은 책자를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보기도 해서 내 가방에 '스타크래프트' 게임 설명서가 실려있는 날도 있었다. 게임을 잘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런 과정을 즐겼고, 어릴 적부터 집에는 동생이 산 신상 게임들의 설명서도 주기적으로 등장했다. 별것 없었지만 오래된 기종이었던 내 첫 중고 자동차의 설명서를 구해 읽기도 했다.
RTFM
사실 그 시작은 동네 문구점에서 살 수 있던 카드와 보드게임이었다. 문구점에는 다양한 이야기와 규칙을 가진 저렴한 카드게임을 팔고 있었다, 종류도 많고 주기적으로 '신상'이 등장하기도 했다. 블루마블로 대표되는 보드게임류 등도 저렴한 버전으로 많이 있었다. 그걸 용돈으로 사가지고 와서 동생과 둘이, 때로는 친구들과 마주 보고 설명서를 읽고 게임하는 것이 한참 계속되었다. 읽고 따라 해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떨 때는 스케치북에 나만의 규칙을 가진 게임을 그려가기도 했다. 안타깝지만 그렇게 잘 모아진 게임들은 어느 때 몇 번의 잔뜩 혼남과 함께, 나의 만화책들과 함께 버려지곤 했다. 아, 상자에 담겨 버려진 애처로웠던 어린 신난 날들이여. 그때의 기억으로 이번 항저우 아시안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 5' 부분에서 김관우 선수가 금메달을 땄다는 기사를 보고는 응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생과 나는 체스도 그렇게 둘이 문구점에서 산 보드게임의 설명서를 읽고 배워서 하게 되었다. 명절에 어른들이 종종 하던 간이 장기바둑판과 알도 있어서 장기도 두었고, 뒤집어 바둑판에서는 오목을 두었다. 어느 날인가는 바둑돌을 정리하던 내게 아빠가 바둑을 알려주겠다며, 신난 표정으로 단수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하는 거야.' 그리고는 눈을 맞추며 내가 잘 이해했는지 확인을 했고, 잠시 바둑판을 보더니 '알겠지?' 한번 더 물었는데, 그리곤 침묵이 흘렀다. 그렇게 바둑교실은 영영 끝났다. 사람들이 두는 것을 보긴 했는데 뭘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었지만,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에 문제 되지 않았다. 내가 알고 있는 세계로 충분했으니까.
그러다가 바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고스트 바둑왕' 만화책과 그 안에 나온 '신의 한 수'라는 매력적인 표현 때문이었다. 바둑돌을 쥐고 팔을 뻗으며 '탁' 하고 내려놓는, 모든 걸 의미 있게 돌리는 신비스러운 '하나의 수'라니 지금 생각해도 그렇다. 어린 히카루가 만들어낼 수 있는, (어렸던) 나에게도 찾아올 것만 같은 드라마틱한 순간을 기대하게 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회사에서 월화수목금금금의 무척 피곤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윤태호 작가의 웹툰 '미생'이 온라인에 연재되고 있었다. 그때 나는 김대리 정도의 위치에서 일하면서 프로젝트가 어서 끝나기를 바라며 집에 돌아와 맥주캔을 따고 퀭한 눈으로 등장인물들에게 몰입되어 있었다. 미생은 종합상사라는 회사 배경 또한 그 매력을 더하는 부분이 있었다. 이 얘기를 하려던 것은 아니지만 적다 보니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바둑은 마음속에 씨앗을 뿌려놓고 조용히 싹트고 있었고 지금도 파릇한 새싹이다.
j는 바둑 경기를 즐겨보고, 온라인 대국도 한다. 우리가 함께 경기를 본 것은 이세돌구단과 알파고의 경기였다. 그런 이벤트가 아니었다면 내가 한 대국을 다 보는 일은 없었을 것 같다. 이해하면서 본 것은 아니었지만 이세돌 구단이 결정적인 한수를 두었을 때, 그 프로그래머들의 웅성거림과 그래프로 확연하게 보이는 확률 변화, 알파고의 버그, 모든 사람들의 환호하는 순간은 정말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나는 입문용 책을 두권 사서 혼자 공부를 시작했다.
그때는 r이 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체스를 배우고 있을 때여서 우리는 종종 체스게임도 했었는데, 기물의 역할이 확실한 체스와 검은 돌, 흰돌로 구분된 바둑은 판 위에 놓이는 위치부터 달랐다. 칸 안에서 움직이는 체스와 교차점 위에서 움직이는 바둑이다. 기물은 자기 영역과 활동범위를 보장받고 움직이지만, 바둑돌은 줄의 교차점에 돌로 놓이며 집이 되는 순간을 기다린다, 내 집의 주춧돌이 될 것인가! j는 바둑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잘 봐, 나한번 두고 너 한번 두는 거야. 알겠지?"
"알지! 그리고?"
"일단 이걸 알아야 해. 이게 규칙이야. 나 한번 두고, 너 한번 둔다."
체스, 모든 기물이 마주 보고 서 있다. 마주 선 여왕들은 자기의 색을 지키고 있다, 흰 퀸은 백색칸에, 검은 퀸은 흑색칸에 놓인다. 우리의 여왕님은 언제나 화려하다. 넷플릭스 드라마 '퀸스 갬빗'의 ‘엘리자베스 허먼’ 자체 같다. 그렇지만 바둑은 그런 것이 없지, 이 부분은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 돌 하나가 이렇게도 쓰이고 저렇게도 쓰이는 거다. 무척 당황스럽다. 이게 끝이라고? 더 설명을 해줘야지. 뭔가 있을 거 아니야? 규칙이 명확해 보이는 체스와 단순한 규칙에서 뻗어나가는 바둑은 낯설고 당황스러운 세계다.
매뉴얼,
내 세상의 매뉴얼은 소화가능한 것뿐이었는데, 그래서 처음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에도 나는 안전했다. 사무실은 매뉴얼이 확실한 곳이어서 그 안의 세계에서 나는 조금씩 확장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그 매뉴얼을 벗어나는 순간, 그때가 문제다.
집 안의 세계는 바닥, 기둥과 벽, 창과 문, 지붕의 요소 그리고 계단, 방과 욕실, 부엌, 거실 공간이 존재하는 곳이지만 그 집이 들어설 곳, 창과 문의 열림이 향하는 곳, 바람이 지나가는 길. 그 막연함을 잡아주는 것은 우리가 지구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다양하다. 지역, 문화, 지형, 재료 등이 기댈 수 있는 구석이 된다, 세일 같은 것도 포함될까. 집 짓기에 돌입하면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집을 짓는 곳이 어디인지, 내가 어디에 누구와 있는 것인지를 힘을 다해 부딪히며 알아가야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j가 알려준 사이트에서 온라인 바둑도 두어보았다. 책상 끝에 노트북을 펼치고 한껏 몰두하고 있는데,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며 바로 뒤 소파에 앉은 j가 말했다. "아니, 이렇게 해야지. 머 하는 거야? 공부 안 했어? 그런 거 책에 나와 있을 텐데. 흠… 아니 저기다 두어야지, 네가 AI냐?" 본인은 아주 재미있어했지만 몇 번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바둑을 접었다, 퓨. 접었다는 표현은 물정 모르는 것이다. 조금 가지고 있던 흥미를 잃었다는 것이 맞겠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더 글로리'가 한창 방영되고 있을 때 주인공 '동은, 송혜교'가 바둑을 두는 모습을 본 후이다. 오호, 어떤 복수의 시작이 된 바둑은 그렇게 또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왜 송혜교 같이 바둑을 두지 못했을까. 절실함이었을까, 오호라 아니 이건 선생님 ‘선배’ 탓이다! 나에게도 친절한 선배가 필요하다. 요즘 바둑 경기가 한창이라 j가 경기를 보고 있었는데 옆에서 조금 관심을 보였더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는지 다시 바둑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네가 왜 바둑을 이해하지 못하는지 연구해 봤어. 네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 지점이 뭘까."
"잘 봐. 여기가 집인 거야, 이 빈 공간들이 아니라. 점이 집인 거야. 그런 것 같지?
"응, 그건 아는 거자나!"
"그래, 알겠어? 잘 생각해 봐. 여기가 집이야."
"봐, 봐"
이렇게 하루가 지나간다.
이 영역은,
호기심을 가지고 있지만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 종목 중 하나다. 나의 '일요일 점심 스파게티' 같은 여유로움을 누리고 싶지만, 어쩌면 늘 이 정도 거리를 유지할지도 모르겠다.
월요일에 썼습니다.
글을 쓰는 중에 김똑띠 작가님의 글에서 이세돌구단이 만든 보드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