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양이삼거리 Jun 18. 2023

얼마나 걸릴까요?

한강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너구리



1

 이건 또 오래 전의, 자전거 달릴 무렵의 일이다. 그때의 나는 가끔 새벽과 밤에 한강변으로 자전거를 타러 나가곤 했다. 어느 날 밤 좁은 길에서 나를 추월하지 못하고 뒤따르던, 아직 어색한 사이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할 수 없이 듣게 되었다.


"몸이 굉장히 좋으신데, 운동하셔서 그런가요?"

"다이어트를 했습니다."

"그러시군요, 얼마나 하신 거예요?"


 한 명, 그다음 한 명 얇고 경쾌한 선을 그리며 나를 추월해서 앞으로 간다. 사이클 장비를 모두 갖춘 날렵한 두 동호인이 내 앞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던 얘기는 마저 해주셔야지요. 같이 듣고 있던 사람 생각도 해서.) 오른쪽 남자가 천천히 말했다.


"10년 했습니다."


 10년이란 어떤 시간일까. 다이어트를 얕잡아보는 건 아니지만 '10년'의 다이어트는 가볍지 않은 굉장한 무게가 느껴졌다. 왼쪽 남자는 더 이상 말이 없었고, 둘의 대화는 거기서 멈췄다. 그들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고, 나는 다른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2

 반포대교에 무지개 분수가 펼쳐지기 시작한 여름이었다. 사람들이 잔뜩 나와있었고, 지나가는 사람들, 머무르는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보조 바뀌 달린 자전거를 타고 쌩하니 달려온 꼬마가 방향을 틀며 급하게 멈췄는데, 그 순간 체인이 탈락되는 것을 내가 보았다. 그가 다시 움직이려고 하니 바퀴가 헛돌았고 당황한 것 같았다, 지켜보았지만 도와줄 어른이 옆에 없는 것 같아서, 다가갔다.


"문제가 생긴 것 같아 도와줄까?"

"네."


 체인을 제 위치에 걸기만 하면 되는 것이어서 나는 뚝딱 간단하게 해결해 주었고, 그런 타인의 모습을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아이는 자전거가 잘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맙습니다.'를 말하고 또 쌩 달렸다. 그래도 아무 어른이나 따라가선 안 되는 거란다.



3

 그는 자신을 미스터박이라고 소개했다. 우리는 양재천이 잠실과 만나는 곳까지 걸어갔다가, 왔던 길을 따라 거의 집 근처까지 같이 돌아왔다. 그는 내가 사는 동네의 맞은편 신축아파트 단지에 산다고 했다. 더 자세한 걸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만두었고, 주말 오전에는 종종 그 길을 걷는다고 했다.


 이사하고 얼마동안은 출근 전에 천변으로 산책을 갔었다. 짧은 시간이어서 멀리 까지는 가지 못했는데, 늘 멈추어 돌아서는 곳이 있었다. 저 멀리 나무가 풍성한 길은 왼쪽으로 굽어 있었서 그 너머는 한동안 미지의 세계였는데, 종종 새벽의 안개가 피었고 나는 꼭 그 앞에서 돌아섰다. 여유가 생긴 주말 아침에 '그 너머로 가자' 생각하고 길을 나섰다. 화창했고 걷는 사람들도 많았다. 코너를 돌자 나타난 새로운 풍경은 '아, 이렇게 이어지는구나'라는 무던한 느낌이었다. 약간의 피식거림은 발걸음을 가볍게 했다.


 그런 산책길의 천 안에서, 물 속에서 어떤 사건이 있어났다, 새가 물고기를 낚는 장면 같은 것이었을까. 그 순간 같이 지켜본 사람들은 놀라워하면서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그때 내 옆에 미스터 박이 있었고, 방금 본 것을 얘기하다가 거리를 좁혀서 같이 걷게 되었다. '저는 러시아에 살았었습니다. 그 오두막 집에는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눈이 가득 쌓이곤 했습니다.' 중년의 그는 영화 같은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내가 꾀 잘 듣는 사람 같았는지, 끊임없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그날의 일들은 모두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 이후로 한동안, 가보지 못한 곳의 설레임은 사라졌다.



4

 비가 내리고 그친 밤, 강 둑 위의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물에 젖은 투수콘트리트 위에서 척척 소리가 났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기다렸다는 듯 사람들은 때 맞춰 산책을 나왔다. 혼자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왼쪽 낮은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옆을 바라보니, 비에 흠뻑 젖은 너구리 한 마리가 함께 걷고 있었다. 그는 앞만 보고 걸었고, 바삐 움직였다. 우리는 잠시 나란히 걸었다.

 

 얼마 전에 우이천 변에서 '너구리공격주의' 메시지를 보았다. 보통은 겁이 많은 너구리인데, 새끼를 낳고 돌보는 중 보호본능이 커진 예민한 시기가 되면 공격을 할 수도 있다 한다.* 우리는 거리 두기가 끝났지만, 너구리에게는 그의 영역을 지켜주는 거리 두기가 필요한 것 같다.


기사참고 :

도심출몰하는 야생너구리,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는 / 뉴스펭귄, 남주원기자

작가의 이전글 여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