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연말과 새해를 보내며 건강하게 잘 챙겨 먹던 우리는 무언의 합의에 이르러 라면을 끓이기로 했다. 작년에 순한맛과 매운맛 사이를 오가며 정체를 고민하던 우리는 순순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순한맛이다. 더 이상 매운맛은 버틸 수 없는 것이다. 대신 고춧가루를 한스푼 넣고 다진 마늘, 식초 약간을 더했다. 물은 꼭 계량해서 정량으로 하고 설명서에 적힌 시간보다 1분 빨리 불에서 내린다. 오늘은 그래도 새해니-깐, 생숙주와 삶은 계란, 어제의 닭백숙 닭고기를 볶아 함께 내었다. 그리고 오늘은, 셋이서 많이 먹겠다고 마음 먹으며 네개씩 끓여놓고는 다 못 먹고 아쉬워하던 어제의 흥분을 가라앉히고 대신 밥을 했다. 물론 또 밥이 많이 남았지만 냉장고의 찬밥은 순발력 있게 별식으로 만들어지기도 하니까 걱정이 없다. 불어서 냄비에 남겨진 라면을 보는 일은 이상하게 다른 그 무엇보다 신경이 쓰인다. 잘 짜여지지 못한, 맛있게 먹었지만 완전하지 않았던 그래서 남겨진, 과잉된 설계를 만들어낸 기분이 든다. 그리고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한 봉지 이상의 면을 끓이면, 한 명이 한 그릇의 양을 먹는 사이 초과되는 양의 면이 불어서 맛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라면 끓이고 먹는 일에 내가 조금 우습게 치밀해지는 것은 많은 실험, 연구를 거듭한 한 봉지가 부담 없이 내가 다룰 수 있으며 맛있는 만족감과 재미, 여유로움을 주는 만만한 영역에 들어오기 때문인 것 같다. 한그릇의 완성품, 시작으로는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