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생활
"마마, 이거 참외야?"
"아니 파파야."
먼 동네 시장을 걷다가 파파야가 보여서 쏨땀을 해보려고 샀는데, 너무 오랜만에 하는 것이라 그린 파파야를 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반가운 마음에 덥석 잡아 집으로 왔다. 반을 가르면서 달콤한 향과 부드럽게 잘라지는 모습을 보며 '아차' 싶었다. 이 상태로는 단단한 식감이 생기지 않는다. 더덕보다는 도라지같이 질긴듯하면서 찧어져 양념이 잘 베어든 채 썰어진 파파야가 쏨땀의 매력인데 살리기가 쉽지 않다. 큰소리로 쏨땀을 할 거라고, 파파야를 사 왔다고 외친 것이 무색하게 도마 앞에서 조용하게, 어떻게 수습할 것인지를 궁리했다. 다행히 껍질을 얇게 벗긴 상태에서 겉의 과육은 단단한 식감을 가지고 있어서 둘러가며 필러로 벗겨 적은 양이지만 쏨땀을 한 접시 만들었고, 나머지는 씨를 걷어내고 썰어서 식탁에 올려두었다. 이렇게 하려면 수박이나 참외로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진짜 멜론인 줄 알았어!"
간간히 양념되지 않은 파파야를 곁들여 먹던 j가 말했다. r은 학교에서 나온 참외는 속을 버리고 겉 과육만 주는 것이 이상하다는 얘기를 시작하며 파파야-멜론-참외로 이어진 것이 우리 저녁시간이었다. 커다란 참외 같기도 했던 잘 익은 파파야. 나는 무엇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첫 줄을 꾀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 달은 다 되어가는 지금, 알았다. 특별히 이걸 이어서 적게 된 이유는 '그린파파야의 향기' 감독의 신작 영화 때문이다. 단순하게 '파파야'라는 단어가 주는 '풋풋함'이 떠오르면서 익은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아야 다음번에 잘 사 올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검색을 통해 알아낸 것은, 내가 산 것은 파파야가 아니라 '파파야멜론'이었다는 사실.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서, 방금 글의 제목을 파파야에서 파파야멜론으로 수정했다.) 파파야를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한 내가, 채소 가게 사장님이 "파파야"라고 당당하게 써놓은 품목을 철석같이 믿은 것이다. 그 시장을 지나갈 일이 있으면 꼭 얘기해야겠다. '이걸로 쏨땀을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도 겉의 조직이 비슷했습니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큼직하고 달콤함은 좋았어요.'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 제대로 된 그린파파야를 사서 쏨땀을 만들어야겠다. 아니면 정말 도라지는 어떨까.
지금은, 그래서 내친김에 파파야멜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가지고 있던 현금 2000원을 주고 한 개를 사서 들고 다녔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이다. 사실은, 들고 다니다가 그늘에서 찍은 파란 비닐봉지의 장력이 마음에 든 이 사진을 쓰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파파야에 대한 글쓰기는 영 엉뚱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제목은 그냥 '여름 풍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작과 글의 첫 줄에 무척 애정을 가진 것이 문제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다행히 잘못된 상황에 대해 감을 잡을 만한 피드백을 해냈다는 것에 만족한다. 숙성된 파파야와 그린 파파야의 구분을 알아보려고 했던 시도이다. 파파야의 씨앗을 가르며 멋지게 쏨땀을 만들어내던 옛날의 나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쏨땀은 동네 볶음국숫집에서 꼭 같이 포장해 와서 자주 먹던 때가 있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안보이신 이후로는 어쩐지 가지 않았다. 그분은 원래 근처에서 프랜차이즈 카페를 운영하시며 차분한 미소로 우리를 맞아주신 사장님으로 r이 무전기를 들고 다니던 초등학생일 무렵, 학교에 데려다주고 아침에 주로 가던 곳이었다. 우리는 고집스럽게 집에서 더 가까운 후문으로 가지 않고 꼭 정문으로 등교했다. 어느 날은 학생들이 자주 가는 새로운 식당이 있는 것 같아서 ‘우리도 가보자’하고 갔더니 같은 사장님이 운영을 시작하신 곳이었다. 겉절이 담그는 솜씨로 피시소스와 붉은 고추, 토마토, 마늘 등을 다 넣고 절구에 빻아 맛깔나게 무쳐주신 쏨땀은 신선하고 개운하게 다양한 맛을 내면서 볶음면과 잘 어울렸다. 집에 가지고 와서 땅콩 크런치를 버무려 먹었다.
얼마 지나서 사장님은 카페를 정리하셨고 언제부턴가는 식당에서도 뵐 수 없었는데, 우연히 근처의 시장에서 인사를 하게 되었다. 길 따라 난 시장의 한가운데, 비밀처럼 위치한 골동품이 가득한 곳이 사장님 남편이 운영하는 가게였다. 가게라기보다 아지트처럼 보이는 그곳의 입구에는 매발톱, 노루오줌이 심어진 화분이 있었고, 옛 탈곡기 같은 농기구에 상점 안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과 그림이 걸려있고 작업공간도 따로 있었다. 게다가 지하로 통하는 비밀 아닌 비밀 입구도 있는 묘한 곳이다. 그곳은 열린 것인지 닫힌 것인지 알 수 없는, 그저 그렇게 있을 뿐인 가게이지만 처음인 사람들의 눈을 끌기에 충분했고 지금도 항상 제자리다. 그런 공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미소는 신비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이건 풋풋했던 우리들의 10여 년 전 기억이다.
그때의 이야기라면 길 건너 맞은편 또 다른 카페 사장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곳은 도로와 비스듬하게 배치된 단층 건물의 제일 구석에 위치한 카페로 나무 아래에 야외 테이블도 있고 꾀 깊숙하게 매장이 넓은 프랜차이즈 카페였다. 사장님은 매일 아침에 기다란 집게를 들고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마당의 담배꽁초를 주으셨고 햇살이 좋았고, 테이블마다 작은 꽃이 담겨있었다. 어느 날은 라일락으로 꽃병을 장식하셨는데 유난히 기분이 좋으셨고, 갑자기 우리에게 물으셨다. "라일락의 꽃말이 뭔지 아세요?" "모릅니다, 뭔가요?" "첫사랑이에요. 예쁘죠? 저는 첫사랑과 결혼을 했답니다. 호호호홍 ^^" 우리는 사장님의 학창 시절부터 시작된 첫사랑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용이 잘 기억나지는 않고 사장님의 웃음소리만 기억이 난다. 덩달아 기분 좋은 하루였다. 그 카페는 제법 단골이 많아서 주말에 가족들이 여유로운 아침을 즐기는 모습을 많이 보았고, 우리도 그중 하나였다. 가게 주인이 바뀌고 새로운 분은 근처 중국집 사장님의 친구분이셨는데, 가끔 일을 도와주러 오셔서 얼굴을 알고 있었다. 가족들이 함께 카페를 운영했는데 오래지 않아 다른 업종으로 바뀌었고 야외 테이블 대신 주차공간이 늘어났다. 자주 가던 그 중국집도 주인이 바뀌고 우리는 조금 먼 곳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모든 게 마당을 가꾸는 사람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의 이야기라면 우리는 시장에서 장보기보다 대형 마트에서 주기적으로 물건 사기를 즐기던 시절로 쏨땀을 하겠다고 파파야멜론을 사는 일은 없었겠지만, 지금은 보다 더 우리에게 맞춰진 생활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곤충 기록 24.06.27. 18°-29° 서울
이렇게 많은 러브버그를 본 일이 있었을까. 한 가지 좋은 소식은 러브버그의 이동경로를 살펴보다가 밤에 불이 켜졌을 때 북쪽 창에서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고, 창을 모두 닫은 결과 모기까지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추측으로는 물 빠짐 구멍도 잘 막혀 있고 모기장도 있는데 들어온 것으로 보아, 창과 모기장의 틀과 틀이 딱 맞춰지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모기장의 프레임과 유리가 만나게 되는 경우, 그 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아서 막을 방법을 연구 중이다. 우리집 모기관리본부장인 내가 해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