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 열 + 0000 + 종
부동산 사장님이 비밀스레 건넨 쪽지에는 이런 게 적혀있었다. 우리는 한참 들여다보며 이게 뭔가를 살펴보았으나 암호 같은 단축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한때 재밌게 하던 방탈출 보드게임 속 암호를 전달받은 것 마냥 셋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공동현관 비밀번호 주신 것은 알겠는데, 경, 열, 종은 뭘까. 안타까운 것은 우리 중 누구도 공동현관 비밀 번호를 눌러본 적이 없는 것이다. 윤여사님 댁에는 한 때 공동현관에 번호키를 도입하여 운영되었으나, 몇 년 지나자 예전 방식으로 바뀌었고 나도 몇 번 눌러본 게 전부인데 이건 도통 모르겠다. j는 현관 앞으로 가서 유심히 살폈다.
“이야, 나 알겠어!”
키패드에는 경비원, 열쇠, 종이 그려진 버튼이 있었다, 상징적이다. 경비원을 지나 네 개의 황금 열쇠를 끼워 넣으면 종이 울리면서 문이 양 옆으로 사르르 열린다. 그렇게 우리는 공동현관 번호 누르는 집에서 살게 되었다. 며칠 후 택배를 주문할 일이 있었는데,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적어놓지 않아서 연락이 오면 알려드리거나 그냥 앞에 놓아주세요, 할 요량으로 기다리고 있었는데 연락 없이, 생각지 않게 집 바로 앞 현관에 택배가 배달되어 있는 일이 있었다. 아하, 우리만 모르는 공동현관의 비밀이다. 어쨌거나 택배주문할 때 꼭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적는데 경, 열, 종을 적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모두 모여 의논했으나 그건 우리만 몰랐던, 남들은 다 아는 거였다는 결론을 내고는, 특히 택배 기사님들은 현관출입 방식에 대한 최신 트렌드를 포함한 다양한 경험을 가지고 계신다는 생각에 이르러 번호만 적고 있다. 사실, 적지 않아도 택배는 우리 집 현관 앞에 올 것 만 같다. 아래층 귀여운 여고생이 사는 이웃댁에는 다양한 택배가 끊이지 않고, 옆 집 고양이와 외국인 부부댁에는 국제 우편도 활발하다. 택배 관해서 지금 집은 구역이 달라져서 그런지 일요일에도 배송이 되어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말로만 듣던 배송 후 사진 서비스를 받고 보니 도시에 사는 기분이 났다. 내가 주문한 택배와 r이 주문한 택배가 나란히 도착해서 우리는 동시에 같은 사진을 받았다. 예전 집은 한겨울 빼고는 1층 현관문이 주로 열려있어서 고양이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위층 할머니가 가져다 놓은 의자 위에서 쉬어가기도 했다. 연마된 테라조, 현관 바닥이 고르지 않아서 집에 들어올 때 왼쪽 문은, 당기면 바닥에 살짝 걸려 잘 열리지 않으니까 밀고 들어가는 요령이 필요했다. 자동문인 공동현관은 안에서는 센서가 작동돼서 열리지만 (위치를 잘 잡고 서야 문이 열을 열어준다.), 밖에서는 번호로만 열리고 일정 시간이 되면 사람이 있건 없건 칼같이 닫히기 때문에 머뭇거리면 안 되고, 당장 들어가야 한다. 다른 누군가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열린 문을 향해 손이라도 내민다는 것은 큰일 날 일이다. 경, 열, 번호, 종, 이 순서를 지켜야 한다. 며칠 현관에 낙엽들이 옹기종기 들어와 있는 것을 보았는데 이놈들은 그걸 다 해결하고 관문을 통과해 들어온 것이다, 무척 귀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