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연애담과 24절기 제철 술상
00. 프롤로그
헤어지고 일주일, 비가 오면 김치전을 먼저 생각하는 청춘을 위해서라도 김치는 맛있어야 한다고 했던가? 나이 마흔 넘어 이혼도 아니고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래도 5년을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진 다음 날, 비가 내리고 동네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낮술 정도는 마셔줘야 헤어진 사랑에 대한 예의다.
오늘은 뭘 먹을까? 주룩주록 비오는 풍경이 잘 보이도록 문이 활짝 열린 1층 실내포차가 눈에 띈다. 적당히 오래 됐고, 적당히 깔끔한, 게다가 젊어서 꽤나 예뻤을 것 같은, 날씬한 몸매의 아주머니가 분홍 립스틱을 바르고 있다. 이런 집이라면 대충 중간은 한다.
“오늘 백합탕 좋아요. 내가 원래 해물탕집을 했거든...”
백합탕에 소주와 얼음을 부탁한다.
“잔은 글라스지?”
주인은 스리슬쩍 말을 놓으며, 가정용 냉장고 얼음을 분홍색 케이스 째 내준다. 맥주글라스에 얼음 채우고 소주를 콸콸 붓는다. 비오는 풍경을 감상하며, 잔을 흔들어 얼음을 살짝 녹이고는 쭈욱 들이킨다. 아~ 시원하다! 친구가 오고 대합탕이 나온다. 맑은 국물에 굵은 대파, 청량고추도 제법 칼칼한 것이 맛있다. 역시 난 술안주에 촉이 좋다. 방송작가 십수 년의 경력에 가장 보람 있는 것은 맛집에 대한 촉과 24절기 제철 식재료를 외우는 것이다.
일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시간은 쭉쭉 잘 흘러갔다. 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뭔가 허전했지만 괜찮았다. 싸워서 헤어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싸우지 않아 헤어졌을지도. 5년을 만났으나 매일 연락해서 ‘뭐해’, ‘잘자’ 하던 닭살 커플도 아니었다. 그런데…
“춘천에 닭갈비 먹으러 갈까?”
형부의 전화를 방구석에서 받는 순간 깨달았다. 요즘 나 왜 계속 집에 있지? 봄이 오면 도다리쑥국이나 주꾸미를 먹으러 떠나고, 복날이면 신안 민어탕이냐 춘천 닭불고기냐 고민하며 떠났었다. 아직 내가 맛보지 못한 평양냉면 집 순례는 언제가 마지막이었지?
그와 나의 5년은 그랬다. 우린 한 달에 한 번을 목표로, 최선을 다해 여행을 다녔다. 한 도시에 며칠씩 머물며 마치 답사라도 다니듯 샅샅이 훑어보고 맛있는 것을 먹으며 술을 마셨다. 그 남자뿐만 아니라 나의 연애는 항상 먹는 것으로 시작해 먹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연애를 쉰다고 먹고 마시고 노는 술과 여행의 나날도 끝난 걸까?
소화 능력이 유달리 떨어져 콜라도 피자도 잘 안 먹는다. 내일 모레 80인데도 삼시세끼 반찬투정이 심한, 정읍이 고향인 아버지와 유난스레 부지런한데다 손맛이 좋은 어머니의 셋째 딸로 태어났다.
전국은 물론 세계를 누비신 까다로운 입맛의 감독님들 밥집수발을 시작으로 전국 오일장부터 사라져가는 토속음식, 트렌드 맛집, 간판없는 맛집 방송, 여행, 소비자 리포트 등 십수 년 동안 숱한 인터뷰와 방송을 거쳐 제철, 현지, 숨은 맛집찾기에 달인이다. 팔도 토속음식과 24절기 제철 식재료 달달 외우기, 물때 계산하기는 물론 전국의 이장님, 어촌계장님, 부녀회장님들을 5분 만에 녹이는 무한 넉살이 필살기였다.
물론 한때는 가보지도 않고 전화로 찾은 맛집이 막상 가서 먹어보니 맛이 없어 얼굴 뜨거운 적도 있었다. 연애를 하면서 먹고 마시고 노는 능력을 제대로 발휘해 직접 발로 뛰고, 직접 맛보며 전국의 맛집 지도를 새로 그려왔다. 짧게는 2-3일 길게는 열흘에서 석 달까지 한곳에 정주하는 여행을 추구하며 본업인 방송취재가 아닌 오로지 발길 닿는 대로 떠도는 것이 행복한 여행자의 입장에서 맛집을 찾아다닌 게 10년 넘었다.
그런데 이제 난 누구와 더불어 제철 맛있는 안주에 술을 마실까? 허균은 유배지에서 지난 날 먹어본 수많은 음식의 기억을 글로 써서 남겼다는데... 나는 지난 날 수많은 애인들과 더불어 먹었던 맛난 안주의 기억을 남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