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배와 명상
다리를 포개고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에 집중하는 것, 좌선 명상을 해 본 적이 거의 없다. 다리에 쥐가 잘 나서 좌식 식당에라도 가면 앞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다리를 쭉 펴고 앉는다.
그런데 까미노 데 산티아고, 그 길에서 나의 별명 중 하나가 페레그리노(peregrino : 순례자) 요기(Yogi, 요가 수행자)였다. 그 길에서 나는 빅카메라(무식하게 캐논 350D를 들고 갔다), 페레그리노 닥터(발마사지를 잘했고, 체한 사람 손도 따줬다), 페레그리노 요기 등의 별명으로 불렸다.
이탈리아에서 온 한 순례자는 내 앞에서 가부좌를 틀어 보이며 3년 동안 요가 수련을 했다고 나는 얼마나 배웠는지 궁금해 했다. 요가원 2-3달 정도 다닌 게 다였다는 말에 그는 깜짝 놀랐다. 서양 사람들은 동양인을 좀 신비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서로 다른 생활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난 5월에 출발했는데 이미 해가 많이 길어져 밤 10시에 해가 졌다. 많은 사람들은 더위를 피해 새벽 일찍 길을 나서고 12시 전에 발걸음을 멈췄다. 까미노는 스페인 북쪽 산길이라 우리나라 강원도랑 비슷하다. 낮에는 민소매를 입어도 더웠고 저녁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패딩을 입어도 될 정도로 추웠다. 일교차가 매우 크다. 뜨거운 한낮의 태양 아래 걷는 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시에스타(siesta), 낮잠 자는 시간에는 상점도 관공서도 문을 닫는다.
2시부터 4-5시까지 바르나 레스토랑도 운영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 12시에는 도착한 마을에서 밥을 먹고 쉬는 것이 좋다.
그러나 나는 그 길에서 내 방식대로 걸었다. 아침에는 알베르게(순례자 숙소)에서 주는 아침을 먹거나
전날 저녁 먹고 남긴 것을 간단하게 먹었다. 대개 커피와 빵, 샐러드나 과일 정도다. 거의 8시나 9시가 되어서, 제일 꼴찌로 길을 나섰다. 아침을 먹고서도 첫 번째 눈에 띄는 바르(bar)에는 꼭 들린다. 까페 콘 레체 그란데 (café con leche grande)를 먹어야 하니까.
커피를 좋아하는 내게 까미노가 천국인 이유 중 하나. 우유를 듬뿍 넣은 진하고 부드러운 커피가 단돈 1유로였다.
나는 하루에도 3-4번 커피를 마셨다. 처음엔 설탕을 넣지 않았으나 계속 길을 걷는 게 힘들기도 하고
군것질을 하지 않아 단 게 생각나기도 해서 설탕도 듬뿍 넣어 먹었다.
나를 마이 리틀 클라라(My little Clara)라고 불렀던 프랑스 파파는 내게 항상 설탕이 더 필요해, 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죄책감 없이 설탕을 듬뿍 넣어 먹었다.
*글라라는 나의 세례명인데,
내 이름 은주는 외국인이 발음하기 너무 어려웠기에
사람들은 나를 세례명으로 불렀다.
뜨겁고 진하고 달디 단 커피가 참 맛있었다. 요즘도 그때 생각이 나서 아침마다 에스프레소에 설탕 한 스푼을 넣어 마신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 난 참 못 걸었다. 사람들은 내가 산티아고 다녀왔어요, 하면 아주 잘 걷는 줄 알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익숙치 않은 등산화에 발병도 났었다. 오히려 그 때문에 천천히 쉬엄쉬엄 걸었다. 빅카메라가 든 빅 배낭을 메고 한두 시간 걸으면 쉬었다.
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신발은 물론 양말도 벗고
완전히 쉬었다. 때론 벌러덩 누워 나만의 시에스타를 즐기기도 했다.
처음엔 다른 순례자들이 동양의 작은 여자애가 괜찮은지, 발에 문제가 있는지 걱정했다. 가다가 돌아서 묻기도 했다. 부엔 까미노(Buen Camino:좋은 길 되세요~)만큼이나 흔한 인사여서 아무렇지 않게 생각했는데 한 순례자가 다른 순례자에게 “클라라 괜찮아, 쟤 그냥 쉬는 거야”혹은 “그녀는 매일 피크닉 중이야”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알았다.
침대까지 신발 신고 다니는 그들은 내가 양말까지 벗고 있는 모습이 생소했고 정말로 내 발을 걱정한 것이다.
걷다 보면 자주 만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를 알고 친절하게 다른 순례자에게 설명까지 해준다.
쉴 때 바닥에 스카프와 플리스 겉옷을 깔고 양말과 신발을 벗고 앉으면 자연스럽게 다리를 포개게 된다.
떠나기 전에 Mp3 플레이어가 망가졌고 로밍도 하지 않고 들고 다니던 핸드폰마저 망가져 한국으로 보냈다. 나는 길을 걸을 때도 앉아서 쉴 때도 음악을 듣지 못했다. 대신 바람소리, 풀잎이 흔들리는 소리,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를 들었고 그런 소리가 정겹고 평화로워서 눈을 감고 콧노래를 부르며 몸을 흔들흔들했다. 그 모습이 서양인들 눈에는 좌선 명상으로 보였나 보다. 그래서 내 별명이 페레그리노 요기였다.
아침 늦게 나서서 매일 피크닉을 한다는 느낌으로
점심도 길에서 먹고 좋은 풍경을 보면 하염없이 멍 때리기도 하면서 오후 늦게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내 방식대로 내 마음 가는 대로 여행하던 그때가 참 좋았다. 내가 걸었을 때는 한국사람이 워낙 적었기 때문에 그들 눈에는 내가 더 신비한 동양인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행지에 가서 좋은 풍경을 만나면
난 가만히 앉아 멍을 때린다.
그게 내게는 최고의 명상이다.
앉아서 하는 정적 명상보다 산책으로 걷거나 108배를 하는 동적 명상을 좋아한다.
오늘은 108배를 하며
까미노 데 산티아고 생각을 하니
다시 그 길에 가고 싶다.
올해 가을쯤 다시 까미노를 걷고 싶다,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판데믹으로 힘들어질 것 같아 걱정이다. 뭐 올 가을이 아니면 내년 가을에라도 가지 뭐!
plan is just pl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