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한 것은 없다!
달, 별, 꽃, 바람, 웃음, 농담...
내 원체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오!
- <미스터 션샤인> 희성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난 희성이 참 좋았다. 그 나름의 비애가 있겠지만 타고난 배경으로 인한 짝사랑의 아픔도 컸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농담과 미소를 잃지 않는 데다 “아름답고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는 게 낭만적이었다.
제주도 올레길에 한창 푹 빠져 있을 때, 노는 것도 힘이 들어 아프니까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보다 못해 동네 지압 삼촌을 소개해 주었다. 서울로 비행기 타고 출장 다니며 회장님 마사지해 주는 유명한 분이라 했다. 마사지로 몸을 노곤노곤 풀어주시면서 마치 점사를 하듯 중얼거리셨다. 오리지날 제주 토박이말에 약간 어눌한 듯 말이 느릿했는데 요약하자면 이렇다.
- 게을러! 손에 재주도 많고 재능도 많은데 그러면 뭘 하나? 좀만 재주를 부리면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점점 더 게을러지는데. 게으름 피우지 말고 재주 부리지 말고 제대로 재능을 펼치면 참 좋을 텐데 그게 그렇게 안 되나?
뭐 이런 내용이었다. 가끔 삼촌의 말을 떠올리기는 하지만 나는 타고난 게으름쟁이라 계속 이렇게 살고 말 것 같다. 하긴 내 별자리 차트를 봐도 일은 놀이처럼 하고 놀이는 일처럼 한다고 나온다. 내가 여행을 다니고 맛집을 페북이나 블로그에 올리면 사람들은 여행 프로그램이나 요리 프로그램을 하는 줄 안다. 난 사실 내 돈 안 들이고 여행을 가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리스 출장 간다고 여권을 초스피드로 만들었는데 취소된 이후 해외 출장은 한 번도 못 가봤다. 이번에도 6월에 영국 답사 간다고 김칫국 마셨더니 코로나 19 사태가 훼방을 놓고 있지 않은가? 하긴 한양도성 길을 친구들과 놀며 걸을 때는 재미있었는데 막상 토크쇼를 위해 한양도성 걷다 보니 영 힘들어 한 코스의 반도 못 걸었다. 어차피 일을 위한 출장은 여행이 아니니 아쉬워하지 말자!
최근 바쁜 마감 중에 자꾸 책을 읽는다. 원래 책이란 사놓으면 언젠가 읽게 되어 있는 것인데 그 언젠가는 대개 마감으로 한창 바쁠 때일수록 더 자주 찾아온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과 칼 융의 레드북,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3권을 짬짬이 돌려 읽는 맛이 아주 달콤하다.
아이들에게만 놀이가 필요한 게 아니다. 어른에게도 현재의 즐거움 이외엔 아무 목적도 없는 행위에 빠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나 놀이가 제 구실을 다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일과 관계없는 부분에서도 기쁨과 흥미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 버트런드 러셀,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1935년
이 글을 읽는 순간 희성 다음으로 낭만적이고 멋진 신사를 알게 되어 기뻤다. 사실 나는 일은 놀이처럼 하고 놀이는 일처럼 하는 것이 좋다. 막내작가로 일할 때 매일 12시 넘어 퇴근하고 집에 와서도 난 잠을 아껴 가면 한 시간은 놀고 잤다. 아침에 눈뜨면 출근해야 하는데 내가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도 아니고 하루 종일 일했으면 한 시간이라도 날 위해 놀아야지! 했다. 워라밸(일과 놀이의 균형)이란 천칭자리의 단어이고, 나는 뼛속까지 천칭자리다.
버트런드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김영하의 책 읽는 시간 팟캐스트에서 내가 가장 많은 들었던 책이다. 오디오로 듣다가 이제야 책을 사서 읽고 있는데 내용이 참 좋다. 내 나름대로 그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면, “냉철한 지성을 바탕으로 세상만사의 균형과 아름다움의 추구를 통해 이상 세계를 역설하는 낭만주의자”라 할 것이다. 러셀은 1872년 5월 18일 생으로 태양 별자리가 황소자리고 달 별자리가 천칭자리다. 태양과 달 모두 천칭자리에 요즘 황소자리 시기를 지나는 내게 러셀이 이토록 흥미로운 것은 당연할 것이다.
마감을 코 앞에 두고 짬짬이 책을 읽으니, 천칭자리 러셀이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라고, 노동이 미덕이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허상이라고, 더 게으르게 살아도 된다고, 무용한 지식들을 자양분 삼아 인생 재미있게 살면 그뿐 아닌가, 하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를 되살려주고 있다.
놀이는 아이뿐 아니라 어른에게도 필요하다는 러셀의 말은 200% 옳다!
요즘 108배와 글쓰기는 내게 놀이다. 내가 좋으니까 재미있으니까 하지 누가 시켰으면 못할 일이다. 정작 돈 버는 글쓰기는 하기 싫을 때가 더 많다. 오늘도 108배와 글쓰기는 이렇게 열심히 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내 인생은 “일은 놀이처럼 놀이는 일처럼”이다. 108배도 했으니 이제 슬슬 오늘 마감을 지켜보자. 마감 직전의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