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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배 글쓰기 81일째] 삶에 필요한 간격

“배우는 돈이 급할 때 연기를 제일 잘한다.”

- 윤여정


푹 자고 일어났는데 턱이 얼얼하다. 어지러이 많은 꿈을 꾸었으나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를 악물고 있다. 천천히 턱의 근육을 풀고, 돌아눕는데 다시 또 이를 악물고 있다. 며칠 너무 힘들었나 보다. 토닥토닥 쓰담쓰담 내 몸의 위로가 필요하다. 108배를 천천히 한다. 오늘은 땀도 나지 않는구나.


마감 원고를 쓰느라 밤을 새우고 아침 6시에 자서 두 시간 만에 일어났다. 아버지 정기 검진 날이라 병원을 모시고 다녀왔다.


“오늘은 약만 타면 되니까 금방 끝나겠지?”


차도 막히지 않아 병원에 일찍 도착했지만 검사를 하나 해 보자 하여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 새로 오픈한 병원에 화분이 가득해 꽃을 좋아하는 어머니와 아버지는 꽃구경으로 시간을 보내고 나는 잠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다행히 검사 결과가 좋아 약을 좀 줄여보자고 한다.


“얼굴빛도 더 좋아지신 것 같아요.”

“요즘 성당에 가지 못하는 어머니가 하루 삼시세끼 밥 챙겨주시고,

아버지도 운동을 열심히 하세요.”


큰 대학병원의 원장님으로 계실 때는 3분, 5분 간격의 진료시간에 병증을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는데 작은 병원을 오픈하시니 의사 선생님도 여유롭게 진료를 봐주신다. 아버지도 의사 선생님의 말에 기분이 좋아 웃으신다. 예상이 빗나가 병원에 머문 시간만 1시간 반, 아침 9시에 나가서 12시가 넘어 집에 돌아왔지만, 약을 줄여도 된다니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기분이 좋아졌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잠깐 컴퓨터를 켜 오후 미팅을 준비한다. 점심으로 갈비탕을 후루룩 마시고 다시 운전해 마포에 간다. 정신없이 두 어 시간을 떠들고 나면 진이 빠진다. 미팅을 마치고 집에 오는 길, 너무 졸려서 진짜 허벅지를 꼬집으며 운전한다. 텐션 강한 샵디 이지혜의 오후의 발견을 틀어놓았는데도 살짝 막히는 길에서는 나도 모르게 눈이 감겼다. 겨우 집에 도착하자마자 화장도 지우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손만 겨우 씻고는 침대에 누웠었다. 그리고 8시간, 푹 자고 일어났는데 이를 악~물고 있다.


계속해오고 있는 프로젝트 중간에 일주일 단기간 아르바이트로 제안서 작업을 했다. 덕분에 전쟁 같은 일주일이었다. 엊그제는 아무리 쥐어짜도 글이 안 써져서 아버지가 편찮으셔서 병원에 간다 거짓말하고 마감을 하루 미룰까 했었다. 그 생각이 드는 순간 깜짝 놀라, ‘아이고 미쳤나 봐. 그러다 진짜 편찮으시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면서 이를 악물고 밤을 꼬박 새워 마감을 마쳤다. 그래서였을까, 이를 악물고 잔 건?


작가는 가난해야 글을 잘 써, 배우는 급해야 연기가 잘 돼. 이런 말을 정말 싫어하지만, 나의 호불호와 상관없이 현실적으로 맞는 말이기는 하다. 수요일까지 하나, 목요일까지 하나를 마쳐서 원고를 보내면 바로 입금이 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사실 아버지 병원 진료 같은 이유로 미룰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어제의 꿀잠도 바로 입금된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사람보다 입금을 믿는 생계형 글 노동자”라는 페친의 소개글을 봤을 때 한참 웃었는데, 마음은 슬펐다. 프리랜서 글쟁이들은 대개 그렇다. 입금된 돈은 며칠 후 카드결제대금으로 고스란히 빠져나갈 것이지만 어쨌든 이달에도 입금이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통장은 언제나 채우면 비워지고 채우면 비워지는 제로섬 같다. 삶은 반복이다. 어제 밥을 먹었다고 오늘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은 것으로 우리 몸은 삶이 반복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워주지 않는가. 비우면 채워야 하고, 채우면 만족하며, 다시 비워지면 또 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계속 반복할 수 있다. 삶은 반복이다.


“삶은 너무나 길어 보이고, 너무도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삶에 필요한, 삶이 가져야만 하는 그 모든 간격 – 열망과 열망, 행동과 행동 사이의 간격, 잠을 위해 멈추는 시간들처럼 피할 수 없는 멈춤 - 을 모르기 때문이다.”

- 앨리스 메이넬


바쁠수록, 급할수록 마감을 쪼갠다. 월요일에 여기까지, 화요일에 여기까지.. 쪼개서 보내자 약속을 하면 그 시간 안에는 어떻게든 마감해서 보내기 때문에 여러 프로젝트를 동시에 병행해서 할 수 있다. 그래도 항상 시간이 부족하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있어도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한정돼 있고, 그 시간조차 충실하게 쓸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중간에 밥도 먹어야 하고 미팅도 다녀와야 하고, 나가려면 세수도 해야 하고, 병원도 다녀와야 하고, 잠도 자야 한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모니터 속의 흰 페이지가 안 채워지는 순간이 더 많다.


그래도 통장이 비면 불안하니까, 또 채워야 한다. 열심히 글을 쓰기 위해 키감이 좋다는 기계식 키보드와 잠이 잘 온다는 마약 베개와 발이 편한 구두와 피부 미용에 좋은 갈바닉 마사지 기계도 산다. 지난번에 산 책을 다 읽지도 못했으면서 또 책을 산다. 그래서 카드 결제대금은 언제나 나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그러면 또 통장이 비고 다시 빈 통장을 채우기 위해 글을 쓴다. 그래 삶은 반복이니까. 어제 밥 먹었다고 오늘 밥 안 먹어도 배고프지 않은 것이 아니니까 어제도 쓰고 오늘도 쓰고 내일도 쓰자.


처음 108배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됐을 때,

늦잠 자고 일어나 오후에 108배를 하고

글이 안 써져 일찍 자고 새벽에 또 108배를 하면

어제도 했는데 오늘 또 해야 하나, 생각하는 날도 있었다.

마감이 급하면 글 쓸 시간이 부족해

밥도 잠도 건너뛸 때가 있으니

당연히 108도 안 한다.


그러나 요즘은 가능한 빼먹지 않으려 노력한다.

삶은 반복이고

삶에 필요한 간격 또한 중요하므로

밥도 매일 먹고, 잠도 매일 자고

108배도 계속하며 나 자신을 토닥이는 시간은 중요하다.


*어제 하루 108배 빼먹었다는 것을 길게도 변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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