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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배 글쓰기 91일째] 애정이 태도를 바꾼다

자세히 봐야 예쁘다

"20대에는 가만히 있으면 뭔가 불안해서 촘촘히 살았는데 이제는 뭘 더해서 나아지는 때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서른 넘어서부터는 바쁘게 지내는 것보다 사색하는 시간이 더 좋아요. 그냥 가만히 앉아서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나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내려놓는 시간도 때로는 필요한 것 같아요."

- 하퍼스 바자, 2017년 3월, 조여정 인터뷰


어쩜 말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방송에 있어서 섭외는 매우 중요하다. 같은 이야기를 하더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의미도 힘도 달라진다. 모든 방송이 그렇지만 한국영화 100년 다큐를 진행하면서 더 절실하게 느꼈다. 이번 다큐의 화룡점정은 내레이션의 배우 조여정이었다.


배우 조여정 내레이션, 메이크업을 안 했다고 해서 얼굴 안 보이게 찍었다!


그녀가 출연한 거의 모든 영화를 봤다. 내가 가장 좋아한 것은 <인간중독>이다. <방자전>에서부터 눈여겨보아 왔지만 <인간중독>의 가볍고 해맑고 얄미운, “이숙진”의 조여정은 주인공 김진평(송승헌)과 종가흔(임지연) 보다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현대무용을 기반으로 발레, 필라테스를 접목한 탄츠플레이로 몸매를 가꾸었다고 등의 잔근육을 보여주던 사진이 가장 기억난다.


등의 잔근육이 예쁜 배우 조여정 (일간스포츠 한국 사진 퍼옴)


내레이션을 누가 할 것인가는 다큐 시작부터 문제가 좀 있어서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여러 명이 물망에 올랐다가 결국 조여정으로 결정되면서 한숨 놓았다. 영화 <기생충>으로 인기가 더 많아졌고 그에 따라 스케줄도 많아졌을 터, 시간이 될 것인가 맘 조렸는데 담당 피디가 공들여 섭외를 했다.


성우 버전으로 거의 완성단계의 원고를 다 뒤집어야 했지만, 그래도 조여정인데, 하면서 기쁘게 수정했다. 우선, 출연 영화들을 봐야 하는데 거의 다 봤다. 기생충만 한 번 더 보기로 하고 조여정을 스토킹 하듯 인터뷰를 뒤졌다. 내레이션 원고 작업을 하기 전에 배우를 인터뷰하면 좋은데, 시간이 없으면 대신 예전 인터뷰를 참고하고 더빙 전에 조율해 수정한다.


제 인생이 어디로 갈지도 모르겠고요. 어떤 작품을 하고 싶다는 대답도 힘들어요. 다만 그저 그날그날 최선을 다할 뿐이에요. 그러다 보면 어느 날인가 제 스스로 '아 내가 이런 것도 하게 됐구나'하고 돌아볼 날이 오겠죠.

일간스포츠 2012.06.01 조여정 인터뷰


조여정은 쉬는 동안 공연 연극 영화 등을 보면서 연기 공부를 했다고 한다. 자신의 연기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의 연기를 관찰하고 전투적으로 보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고. 심지어 평소 해보고 싶었던 제빵 기술이나 현대무용을 배웠다고 한다. 결국 연기하는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만족감도 누려서 좋았다고 한다. "연기자에게 제대로 쉬는 것도 다음 연기를 위해선 중요한 거 같아요. 앞으로 그렇게 영양가 있게 쉰 모습이 연기에 잘 녹아 나올 수도 있겠죠."

노컷뉴스 2006.07.08. 조여정 인터뷰


말을 참 예쁘게 하는 배우다. 애정이 뿜 뿜 뿜어 나서 원고를 쓰는 것이 즐거웠다. 더빙하는 날, 배우는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고, 원고에 대해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더빙 직전 “따뜻한 물 한 잔” 요구한다. 역시! 기본을 갖춘 배우는 다르다. 커피나 단 성분이 든 음료는 목을 잠기게 한다. 목을 풀어줄 따뜻한 물 한 잔을 요구하는 배우는 믿음이 간다.


처음부터 자기 목소리를 정확하게 확인하며 읽고, 피디나 녹음감독, 작가인 내가 요구하기 전에 먼저 다시 읽겠다고 요청하며 진행했다. 끝까지 진행하고 나자 다시 프롤로그로 돌아가 들어보고 3-4번을 재녹음했다. 프로페셔널은 이래서 멋지다!


출연자, 대상에 대한 애정이 담기지 않으면 원고는 표가 난다. 요즘 내가 하는 방송은 거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작년에 동네 서점을 다룬 <백 투 더 북스>가 그랬고 이번에 한국영화 100년 다큐가 그렇다. 책과 영화, 모두 내가 애정 하는 것이니 일을 하면서도 즐겁다. 예전에 모 배우가 촬영을 하는 내내 속을 썩였고, 진행과정이 매끄럽지 못했다. 방송이 나가고 선배가 불러서 원고를 지적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니?” 바로 인정이 되면서 낯이 뜨거웠다. 이후에도 가끔 그 원고가 떠오른다. 이미 방송이 나간 거라 고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이후에 출연자에 대한 애정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솔직히 애정을 갖고 보기 시작하면 미운 사람은 거의 없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처음 108배를 하고 108일 동안 글을 쓰자 마음먹으면서 가장 걱정했던 것은 과연 108배에 대해서 108가지 글을 쓸 수 있을 것인가 였다. 하지만 매일 쓰다 보니 오늘은 이것을 써보자, 내일은 뭘 써야지 하면서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꾸준히 계속하다 보니 애정이 안 생길 수 없고, 관찰과 생각이 더 깊어진다.


108배도 글쓰기도 애정을 갖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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