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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배 글쓰기 94일째] 길의 끝에서

끝은 새로운 시작일까?

“처음 길을 나설 때는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두려웠는데

길의 끝이 다가오자 더 이상 걷지 못한다는 게 슬펐다.”

산티아고 순례 29일째 일기 중에서


108배 일기가 이제 열흘 남짓 남았다. 오늘은 절하는 데 1시간이 걸렸다. 보통 40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자꾸 멈췄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떠올랐다. 처음엔 과연 다 걸을 수 있을까 두려웠는데, 길의 끝이 다가오자 기분이 묘했다. 기쁨보다 슬픔이 컸다.


산티아고 걷기 29일째, 포트마린에서 팔라스 드 레이에 가던 날이었다. 같이 걷던 이들을 먼저 보냈다. 그즈음 나는 자꾸 길을 잃어서 스페인 친구 에네코는 가방에 노란 꽃을 달고 다녔다. 나의 무빙 옐로우 싸인이니 자신을 따라오라고. 그러나 도저히 그 날은 그들을 따라 걸을 수가 없었다. 혼자 걷다 문득, 센티해져서 길에 앉아 한참을 우두커니 있었다.


벤치에 같이 앉아 있던 순례자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길에서 계속 마주치던 그가 손이 불편하다는 것을 몰랐다면, 아마도 그곳에서 더 오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일어나 가방을 메려 하자 나도 일어나 가방을 메기 쉽게 들어주었다. 붕대로 감싼 그의 손에는 빨갛게 피가 맺혀 있었다. 서로 말없이 눈인사만 나누었다. 그도 나도 너무 힘들었다.


그의 가방을 들어주기 위해 일어난 참에 나도 걷기 시작했다. 채 10분이나 되었을까? “클라라” 하고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무빙 옐로우 싸인 에네코다. 원래는 마을 가운데 있는 무니시팔(공립 알베르게)에 묵기로 했는데 그냥 거기서 멈췄다고 했다. 마을 입구에 가까운 알베르게에는 주인도 문만 열어주고 가버려 그 혼자였다. 나도 거기서 멈추기로 했다. 그가 맛있는 것을 해준다고 했다. 샤워를 하고 나오니 벌써 마을 중심에 있는 마트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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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식 오믈렛 또르띠야를 직접 만들다 실패한 나의 천사 에네코! 그래도 맛나게 먹었다.

또르띠야, 감자와 양파가 듬뿍 들어간 스페인식 오믈렛! 내가 하루에 두 번씩도 사 먹는 것을 보더니 간단한 요리라면 직접 해준다고 했다. 결과는 대 실패. 에네코는 프라이팬을 탓했다. 계란은 타버렸고, 감자는 덜 익었다. 스프에 짧은 파스타를 넣은 정체불명의 요리도 맛이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우리는 와인에 두 가지 음식을 곁들여 오래도록 먹었다. 두 사람의 순례자 여권을 비교해보기도 했다. 전체 33일 중에 4일이 남아있었다.

DPSCamera_0321_2.jpg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면서 묵었던 알베르게에서 찍은 도장들, 순례자 여권

오늘 108배를 하는데 자꾸 멈칫거렸다. 보통 50이나 60배에서 한 번 쉬고 물을 마신 다음 계속하는데 오늘은 40에 멈춰 물을 끓이고 보이차를 꺼내 두 번 씻어내 새로 내렸다. 75까지 한 다음에도 한참을 엎드린 채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 보니 108배하는 데 1시간이 걸린 것이다.


108배를 하고서도 메일을 확인하고 답장을 보내고, 전화 통화를 하는 등 딴짓을 하다가 결국 볶음밥까지 만들어 먹고 삼시세끼 VOD까지 본 다음에야 이 글을 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길의 끝에 다다를 때쯤 묘하게 슬펐던 그 감정은 이후로도 때때로 나를 찾아온다. 몇 개월씩 걸려 작업한 다큐멘터리 방송 원고를 넘기고 나서, 예고와 자막 수정과 보도자료까지 넘기고 이제 정말 내가 할 일이 없을 때, 방송이 나갈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못할 때도 그렇다. 108배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4달이 지났다. 중간에 잠깐 멈췄을 때도 있고 해서 108일은 벌써 지났어도 일기는 이제 94일째. 길은 끝나도 인생은 계속되듯, 끝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라 그럴까?


* 108배 일기가 끝나고 찾아올 허전함을 피하기 위해 다음 프로젝트를 디졸브(dissolve)시켜야겠다. 작년 10월에 EBS 특집 다큐 <한국영화 100년을 돌아보다, 내 인생의 한국영화>를 시작하면서 영화를 100편 정도 보겠구나 했었다. 한 편에 2시간씩만 쳐도 100편이면 200시간이다. 얼마 전 정리해보니 정말 100편을 넘게 보았다. 스무 명이 넘는 감독과 배우, 제작자, 평론가 등을 인터뷰했다. 48분에 다 담지 못해 영화는 30편 정도의 클립이 들어갔고, 인터뷰는 1명 당 최소 40분에서 두 시간 정도 진행했는데 15초 정도만 들어간 사람도 있다. 그 모든 게 너무 아깝다. 그래서 그걸 정리해 남기기로 했다. 한창 방송할 때, 준비하고 참고했던 그 많은 자료와 콘텐츠들은 모두 내 외장 하드에 잠들어 있다. 하여간 나도 돈 안 되는 일에 참 열심이다!

한국영화100년1부MAS조여정LOW.mp4_20200502_173638.253.jpg EBS 특집 다큐 <한국영화 100년을 돌아보다 : 내 인생의 한국영화> 1부 나의 사랑 나의 영화 _ 방송은 2020년 5월 11일 월요일 밤 22:40~23:30

※ 디졸브 : 편집 용어, 한 장면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 때 앞 장면을 페이드아웃하면서 동시에 뒤의 장면을 페이드인 시켜 중첩되게 하는 것. 방송하는 사람들은 하나의 일이 끝나기 전에 다른 일을 시작하는 것을 디졸브시킨다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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