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따로 또 같이

입춘, 봄나물과 혼술

“요~만치, 색깔보고 대충~, 새눈물만큼...”

<수미네 반찬>에서 김수미 아줌마의 대충대충 레시피에 셰프들이 곤혹을 치르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그런데 나물은 진짜 그런 레시피가 아니면 맛이 없다.


봄이다. 입춘이라 해도 꽃은 아직 멀었고 날씨는 춥고 겨울은 끝날 것 같지 않지만 남쪽 들판의 나물이 나오는 것을 보면 봄은 오고 있다. 이맘 때는 꼭 경주 성동시장에 가서 나물을 한 봉다리 아니 세 봉다리쯤 사오고 싶다. 나물 때문에 경주까지 가냐고, 하겠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사시사철 하우스에서 자라는 푸르뎅뎅한 나물 말고 봄의 땅에서 추운 겨울 이기고 나온 진짜 나물은 맛이 다르다.


방송 답사 차 경주 성동시장에 갔다가 할머니에게 나물을 한 봉지 사왔다. 냉이, 달래, 참나물, 원추리 등등 이름도 다양한 나물이 한 무더기로 쌓여서 1킬로그램에 8천 원 하기에 만 원을 드렸더니 덤이 더 많다. 두릅도 좀 사고, 취도 좀 사왔다. 엄마가 나물을 보더니 반가워하시며 방송 촬영날에 나물 좀더 사오라고 두 번이나 당부를 하셨다.


“산에 가서 따온 진짜 산나물이라 이렇게 무더기로 파는 거야.

산에는 냉이 따로 달래 따로 원추리 따로 자라지 않거든. 그냥 막 따서 담는 거지.

어릴 때는 먹던 딱 그 맛이네”


2017_0312_gyungju 054_1.jpg


지붕 없는 박물관 경주에는 공장이 없다. 경주 성동시장이 시장의 도매시장이 된 것은 그 덕분이다. 울산, 창원, 마산 등 주변의 모든 도시들이 산업화되어 나물 따위 제대로 자랄 수 없으니 도시의 시장 상인들은 경주까지 와서 나물을 떼어 간다.


촬영날 2킬로그램을 사왔더니 엄마는 모두 데쳐서 한 주먹씩 냉동실에 얼렸다가 입맛을 잃을 때마다 한 번씩 나물을 무쳐주는데 난 이 나물에 혼술을 잘 마신다. 그리하여 봄이 되면 엄마는 경주에 안 가냐고, 나물 좀 사오라고 하는 것이고, 난 나물 때문에 경주에 가야 하나 고민에 빠지는 것이다.


나물 반찬에 술이 맛있다는 것과 혼술을 알려준 것은 K다. 그는 내 남자친구 중에 유일하게 술을 못 마셨다. 안 마시는 것이 아니라 아예 못 마셨다. 술을 마셔보려고 집에서 맥주를 혼자 마시다가 쓰러졌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겨우 반병이 비워져 있었단다. 나와 함께 백세주 두 잔에 도전했다가 몸에 발진이 심한 것을 보고는 내가 말렸다. 세상사람 중에는 정말 술이 안 맞는 체질도 있는 것이다. 술은 맛있어서 먹는 거지 억지로 마실 것은 아니니 술이 안 맞는데 굳이 마실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그의 직업은 불행하게도 방송 카메라 감독이다.


방송쟁이들은 술을 많이 마신다. 일이 고되고 함께 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 술 마실 일이 많다. 기획회의하다 안 풀린다. 술 마시며 회의한다. 일하다가 배고프다. 밥 먹자고 나가 술 마신다. 부장님이, 출연자가 속 썩인다. 욕하며 술 마신다. 그들도 술 마시며 내 욕을 할 것이다. 일하다가 싸운다. 술 마시며 푼다. 풀다가 술에 취해 더 싸울 때는 테잎도 던지고 원고도 던진다. 방송이 잘 되면 잘 됐다고 술 마시고, 방송이 잘 안 되면 잘 안 됐다고 술 마신다. 하나의 방송이 만들어질 때마다 술안주가 쌓인다. 얼마나 힘들고 위대한 프로그램이었는가는 술 마시며 할 이야기가 얼마나 많은가와 비례한다. 요즘은 술 안 마시고 담배 안 피우는 방송쟁이들도 많다지만, 나는 그렇게 방송을 배웠다.


같이 일하던 여자 피디가 술을 마시자고 하더니 소개팅을 하라고 했다. 이런 덴장! 나 남자친구 있어요, 하는데 소개팅남은 벌써 여의도에 도착했다. K였다. 미안하게 됐다 하면서 함께 술 마시는데 그 친구는 다음 날 이라크인가 시리아인가 하여간 내전 중인 나라로 출장을 간다면서 새벽까지 콜라만 마셨다. 한 달 출장 다녀올 동안 현재 남자친구 잘 생각해보라는 것이 마지막 말이었다.


그리고 한 달도 안 되어 난 정말 남자친구와 헤어졌지만 K는 까맣게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의도 길거리에서 K와 우연히 마주쳤다. 알고 보니 그의 사무실은 우리 사무실 건물 바로 옆 건물이었다.


“밥 먹을래요?”


아이템이 엎어졌지만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므로 정말 밥만 먹었다. 술도 안 마시고 왜 그러냐길래, 진짜 아이템이 엎어졌다, 다시 들어가 일해야 한다 하니 K는 조금 미안해했다. 10시, 더 이상 섭외전화도 돌릴 수 없는 시간. 차선의 아이템을 컨펌받고 퇴근하는데 문자가 왔다. 사무실 앞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집에 데려다 주겠다고.


그 날 K와 강릉에 가서 오징어회에 소주를 마셨다. 강릉으로 드라이브 갈까요, 하는데, 경기도 광릉 수목원인 줄 알았더니 강원도 강릉 바다에 가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밤중에 진짜 강릉에 도착했다. 유일하게 술을 안 마시는 남자친구가 운전하는 것도 좋아하니 편하기는 했다. 시간이 언제든 맛있는 게 생각나면 떠났고, 난 맛있는 안주에 술을 마시고 그는 운전을 했다. 술집에 가면 으레히 아주머니들은 술잔을 그 앞에 놓아주었지만 슬쩍 끌어와 나만 마셨다. 혼자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고 쇼핑도 잘 했지만 혼술에는 약했는데, 그와 함께 다니다 보니 따로 또 같이 혼술을 마시는 게 익숙해졌다.


그의 집에 처음 놀러갔을 때, 그는 “잠깐만 기다려” 하더니 감자채를 볶고 나물을 무치고 햄을 구워서 김치와 함께 밥을 해주었다. 그리고 소주를 내놓았다. 날 위해 준비했다나. 그래서 나는 그가 만든 감자채볶음과 나물 반찬에 술을 마셨다.


남자가 만들어준 것이니 무엇이든 다 맛있었겠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자취를 했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온 그는 솜씨가 정말 좋았다. 특히 나물은 적당히 잘 데쳐, 요만치의 소금과 대충 색깔보고 넣은 간장, 새눈물만큼의 기름과 깨소금을 솔솔 뿌려 엄마의 나물맛과 비슷했다. 반주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렇게 밥 반찬에 술을 마신 것은 처음이었다. 볶음이나 찌개 같은 메인 안주도 없이 그냥 반찬에 술을 마시는 것이 참 맛있었다!


K와 헤어지고 알콜 중독에 빠질 뻔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여의도 오피스텔에 혼자 살고 있을 때였는데 반찬을 안주 삼아 매일 마셨다. 3년을 사귀었고, 집은 사고 결혼하자, 라고 해 놓고 어느 날 갑자기, “날 지워” 세 글자 메시지만 남겨놓고 떠났으니 오죽했을까. 두 달을 술독에 빠져 살다가 이사를 했고, 스페인에 가서 산티아고 800킬로미터를 걸으며 매일 한 병의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K를 잊었다.


난 요즘도 가끔 혼술을 마신다. 엄마가 나물 반찬을 해주면 꼭 마신다. 원래 샐러드나 과일 안주에 소주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나물에 소주는 그보다 더 맛있다.


K는 잘 지내고 있다. 나와 헤어지고 얼마 후 큰 상도 받고, 여전히 술은 못 마셔도 회식 마무리 노래방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며 산단다. 몇 년 전 애니* 하트를 보내와 한 번 만났고, 일하는 방송 프로덕션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나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그러나 끝내 묻지는 못했다. 요즘도 K는 집에서 요만치의 소금과 새눈물만큼의 기름과 깨소금을 넣은 나물을 무쳐 여자에게 술상을 차려줄까? K는 게자리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으면 괜히 심술이 나는 것이다. 비록 헤어졌어도 그 남자가 나한테만 특별했으면 하는 바람은 어쩔 수 없다.


입춘이다. 여자의 계절, 봄이 오려고 꽃샘추위가 한 겨울 추위보다 더 무섭게 춥다. 그런데 이 추위를 뚫고 나온 봄나물의 여리여리한 몸채는 왜 그리도 입에 짝짝 붙게 맛있는가 말이다! 엄마에게 또 등짝 스매싱을 맞더라도 오늘은 나물에 혼술을 해야겠다. 추억을 안주 삼아 따로 또 같이.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1. 겉모습에 속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