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배 21일) 시작은 반이 아니다

아픔보다 강력한 동기는 없다


“이 놈의 뾰루지 때문에요.”


열흘 만에 만난 사람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살이 빠졌느냐고. 얼굴이 작아졌다, 부피가 줄었다는 사람도 있었다.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매주 보는데 몰라본 사람이 4명이다. 오른쪽 눈 아래 광대뼈에 자리 잡은 피지 낭종(병원 다녀왔습니다. 전문가도 피지 낭종을 진단하며 방법을 찾아보자 합니다.)이 너무 아파서 열심히 108배, 반신욕, 마사지 등등등 혈액순환에 좋다는 것은 온갖 것을 했더니 피지 낭종이 가라앉고, 살이 빠졌다. 몸무게는 거의 그대로인데 살짝 작았던 바지가 여유 있게 맞아졌으니 부피가 줄었다는 말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사람들이 오히려 전화위복이라며 칭찬을 하니 기쁜 하루를 보냈다. 장마 첫날이었고, 비가 많이 쏟아졌다. 우중산행은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처음이었다. 비옷을 입으니 덥고 숨이 차서 산길이 힘들었다. 길까지 헤매서 40분이면 오를 것을 1시간도 넘게 걸렸다. 그러나 그 모든 고통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깊은 산에 이렇게 좋은 풍경이라니. “멍~”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만 오면 그곳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가보지 않은 곳이라(6년 전 딱 한 번 가봤는데 그때는 겨울이었고, 그냥 지나쳤었다.) 산길을 오를 때는 남몰래 혼자 욕도 했는데... 이제 비가 오면 나도 그곳을 떠올릴 것 같다.


_MG_0456_2.jpg 우중산행 한 시간이면 만날 수 있는 행복한 풍경. 그 풍경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더 행복하다.


한 언니가 그 전 날 속상한 일이 있어서 산에 오기 정말 싫었는데 오니까 이렇게 좋네, 한다. 5년 전인가 그 언니가 내게 그랬었다. “산에 오는 게 돈 버는 거라고 생각하고 매주 나와!” 내가 일이 잘 안 풀려 속상한데 이렇게 놀러 다녀도 되나, 언니들이랑 삼촌들이야 괜찮지만 나는 아직 한창 일할 나이인데 이렇게 평일에 산에 가도 되나 했었을 때다. 그때 언니의 말 듣고 내가 계속 산모임에 나왔고, 결론적으로 그게 옳았던 것 같다. 이제 언니에게 그 말을 되돌려줄 테니 속상하고 힘들어도 매주 산에 나오라고 했다. 언니가 웃으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그때의 나처럼 이제 모임의 막내를 담당하고 있는 나보다 열 살 어린 동생이 우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하루 종일 빗소리와 웃음소리 이야기 소리에 파묻혀 행복을 만끽했다. 집에 돌아와 반신욕하고 바디프렌드 마시지 하고 빗소리 들으며 레몬 진저 차를 마셨다. 평온한 행복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하루를 마감하나 했는데... 자려고 누우니 “삐~” 이명이 들려오며 모든 것이 깨졌다. 수면 어플을 켜고 누워도 한 번 들리기 시작한 이명에 모든 신경이 쏠리기 시작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뒤척이다 잠을 포기하고 서재로 왔다. 무엇을 해도 다운된 기분이 올라가지 않았다.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이명이 괴롭다. 새벽 1시, 바르셀로나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홀인원”의 감동을 생생하게 전달해주는 언니. 기분이 확 올라갔다. 장마 첫날의 행복과 이명까지 다 털어놓고 언니의 요즘 사는 이야기를 듣고 2시간 넘는 통화를 마치니 기분이 좋아졌다. 조울증 환자처럼 몸의 컨디션에 따라 하루에도 여러 번 기분이 바뀐다. 잠을 자고 일어나니 생리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주기가 20일이다. 호르몬의 저주, 피지 낭종은 그 대표적 증후 중 하나다.


의사는 인터넷 보면서 소설 쓰지 말라고 약 먹고 가라앉혀 뭔가 조치를 취해주겠다고 하고, 누구는 이명이 10년째라며 그냥 친구 삼아 살라하지만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봐야지 않을까. 티셔츠를 벗으며 살짝 스쳤을 뿐인데 피지 낭종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툭 떨어진다. 호르몬의 저주니 어쩔 수 없다, 너무 애쓰지 말자 하면서도 몸이 아프니까 오늘 또 108배를 하고 약을 먹고 병원에 간다.


당근과 채찍보다도 몸의 통증은 더 강렬한 동기가 된다. 시작은 반이 아니다. 시작은 시작일 뿐이다. 아무리 작심삼일이 습관인 사람이라 해도 아프면 계속하게 된다. 매일 밥을 먹고 매일 잠을 자고 그 단순한 반복이 삶을 계속 이어가는 원동력이듯이 매일 몸이 겪는 통증은 매일 108배를 시작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다.


108배 시즌1 21일 차 _ 2020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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