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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이야기의 힘은 세다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김원익 평역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주석에 대해 새롭게 생각했다. 주석을 읽기 싫어서 단테의 <신곡>을 던져버린 이후 주석이 많이 달린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도 주석에 질려 포기했었다. 그런데 김원익 평역의 호메로스 <오디세이아>는 본문보다 주석이, 처음과 중간, 끝에 달린 평역자의 해석이 더 재미있었다.      


트로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디세우스는 그 자체로 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10년 이상이 걸렸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시련을 겪는다. 오디세이아는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다. 왜 전쟁 영웅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토록 힘들었을까? 하긴 신화나 영웅담을 읽을 때마다 궁금했다. 그들은 왜 전쟁을 일으키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아버지를 찾아 떠났다가 아버지를 죽이기도 하는가?      


이번에는 해석을 읽으며 궁금증이 많이 풀렸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 승리했으나 전쟁의 끝은 승리가 아니라 귀환이어야 한다. 여행은 떠나는 것이지만, 돌아와야 완성된다. 여행을 떠나 돌아오지 않으면 그것은 여행이 아니라 과정이거나 방랑일 뿐, 끝이 나지 않는다. 그 이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는 해피 엔딩은 동화 속에만 존재한다. 전쟁에 승리한 영웅 오디세우스는 고향에 돌아와 이름을 남겨야 그리스인들이 말하는 최고의 상태인 아레테arete(사람이나 사물이 도달한 최상의 이상적인 상태)를 만끽할 수 있다. 사람의 인생은 끝나도 끝난 것이 아니다. 특히나 영웅으로 이름을 남긴 이들은 후세에도 계속해서 평가가 바뀔 수 있다.      


오디세우스는 신들의 장난에서 시작된 전쟁에 승리했다. 트로이의 전쟁은 파리스의 심판으로 아프로디테가 최고의 미인 헬레네를 파리스에게 약속해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승리한 오디세우스는 다시 포세이돈 신의 미움을 받아 폭풍우와 풍랑으로 모든 것을 잃는다. 그러나 그는 또한 아테나의 사랑으로 온갖 고난을 이기고 진정한 영웅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포세이돈의 방해로 오디세우스는 모든 것을 잃고 발가벗겨진 채 파이아케스 인의 나라에 도착한다. 이때 빛을 발하는 것은 그의 타고난 이야기꾼의 기질이다. 자신을 증명해 줄 부하도 없고 발가벗고 태어나는 아이처럼 아무것도 없는 그는 스스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먼저 전쟁으로 다져진 근육과 외모로 그다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전쟁과 모험에 대한 이야기다. 그가 나우시카아 공주의 환대와 알키노오스 왕의 호송으로 고향으로 귀환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작용한 것은 재미있고 실감 나는 이야기꾼으로서의 능력인 것이다. 한편,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하면서, 스스로 정체성을 찾는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은 “화내는 자”라는 뜻이다. 혹은 가증한 존재, 오이소마이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타케의 왕 라에르테스와 아우톨리코스의 딸 안티클레이아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인 오디세우스의 이름의 그의 외할아버지 아우콜리코스가 지었다 한다.


시시포스와 유명한 도둑이던 아우톨리코스는 오디세우스가 태어날 무렵 이타케를 방문했다. 딸이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을 때, 그는 마침 많은 사람들에게 화가 나 있었기 때문에 “화내는 자”라는 듯의 오디세우스로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다른 전승에 따르면 유모 에우리크레이아가 이름을 부탁했는데, 아우톨리코스는 도둑으로 일생을 보낸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이 품고 있을 증오심을 생각하여 가증한 존재, 오이소마이를 연상시키는 오디세우스라 이름 지었다고도 한다.      


오디세우스라는 이름이 화내는 자이든 가증한 존재이든 그는 인간적이다. 감정에 충실하고 그 감정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며 역사를 만들고, 불세출의 영웅이 되었다.  한편, 호메로스가 그를 노래하지 않았다면 그가 영웅의 대명사로 유명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신은 인간의 욕망에서 시작된 존재다. 어쨌든 인간은 자기 마음에 이끌리는 대로 행동한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헬리오스의 암소에 손을 대지 말라는 테이레시아스의 경고는 오디세우스뿐 아니라 그들의 부하들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배가 고파 죽든지 소를 잡아먹고 신의 저주를 받아 죽든지 일단 배고픔을 면하려 했던 부하들도, 어떻게 해서든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배고픔을 참는 오디세우스도 자신의 마음에 따라 행동했다. 아름다운 유혹자 세이레네스(스타벅스의 로고, 세이렌)의 노래를 들어보고 싶은 호기심에 부하들의 귀는 밀랍으로 막고 자신을 기둥에 묶은 오디세우스의 호기심도 그의 욕망, 마음에 따른 행동이다.      

*스타벅스를 창업했던 세 명의 동업자는 멜빌(Melville)의 모비딕(Moby Dick)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커피를 사랑하는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 스타벅(Starbuck)에서 스타벅스(Starbucks)를 생각해 냈고, ‘세이렌’이라는 인어를 심벌로 활용함으로써 초기 커피 무역상들의 항해 전통과 열정, 로맨스를 연상시키고자 했다.


아테나가 텔레마코스에게 아버지의 절친 멘토르의 모습으로 나타나 그의 행동을 부추기고  “신들이 함께 할 것이니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대로 말을 꺼내라”라고 격려하는 것은 결국 신이란 인간의 욕망, 마음속에서 시작된 존재니 네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으라는 이야기다.      

*멘토 : 정신적 스승을 뜻하는 멘토는 멘토르에서 유래한다. 아테나 여신이 오디세우스의 절친한 친구, 멘토르의 모습을 하고 텔레마코스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리스 신들에게는 욕망만 있고 선악이 없다. 사실 선과 악이라는 것도 절대적이지 않지 않다. 시대에 따라 상황과 사람에 따라 선과 악은 기준이 달라진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이자 분석심리학의 개척자인 칼 구스타브 융이 말한 대로 신화는 심리학의 모든 고대 지식을 요약한 것이다.      


인간이 자연의 폭력에 굴복해야 했던 고대에는 자연과 대결하는 인간은 그 자체로 영웅이다. 희망의 증거고 상징이다. 그래서 오디세우스를 궁지로 몰아넣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오디세우스의 수호자인 지혜의 여신 아테나는 원시적인 자연의 힘과 정신적인 힘의 대결을 상징한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힘과 싸우며 겪는 파란만장한 모험담의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우리에게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자연이 베푸는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낯선 이를 우리를 시험하러 온 신이라 여기며 환대한다면 마땅히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 베풀어주는 신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므로.     


한편, 신화를 좋아하지만 최고 신이나 영웅은 언제나 남자이고, 여신이나 여자는 유혹자, 방해자로 표현되는 것이 불편했다. 김원익 작가님은 옮긴이의 말을 통해 그것이 모권제 사회에서 부권제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민족-유목민족이 모계 중심적이고 평화로운 농경문화를 파괴하며 메소포타미아 신화와 그리스 신화가 만들어졌다. 고대 신화나 조선 왕의 스토리텔링은 물론 자본주의 시대의 광고는 철저히 사람의 마음을 다스리니 역시나 이야기의 힘은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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