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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가난한 작가의 특이한 독서 취향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낮에 부글부글 끓던 속은 가라앉았으나 다시 씁쓸해진 밤,

위로가 필요해 아껴 읽던 책을 꺼내 읽었다.      


넷플릭스에서 어떤 알고리즘에선가 <84번가의 연인>이란 제목의 영화를 한동안 내게 추천해주었다. 아마도 <건지 감자 껍질 파이 북클럽>을 봐서일까? 얼마 전 친구의 페이스북에서 이 영화가 너무 질투가 나서 보다 말았다는 글을 읽고 궁금해서 영화를 보고 바로 책을 구입했는데, 한 번에 읽기 아까워서 야금야금 읽는 중이다. 나는 책에 따라 어떤 책은 한 번에 주르륵 읽지만 어떤 책은 <채링크로스 84번지>처럼 야금야금 나누어 읽기도 한다.      


앤소니 홉킨스와  밴크로프트 주연의 영화 <84번가의 연인> 낡고 오래된 영화였는데 대화체 독백이 아주 인상적이다. 미국에 사는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는 “어쩌다 책에 특이한 취향을 갖게  사람으로 원하는 책을 저렴하게 구하기 위해 영국 채링크로스 84번지(중고 서점가) 있는 마크스 서점에 편지를 보낸다. 일종의 희망 도서 목록이지만 깐깐한 작가의 위트가 넘친다. 이에 답하는 서점의 매니저 프랭크 도엘은 편지의 사본이 보관되지만 점잖고 성실하게 그러나 적당한 유머와 호의로,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1949년부터 1969년까지 무려 20 동안! 책을 주문하는 이유와 취향, 그리고 받은 책의 훌륭한 장정과 종이, 타이포 등에 대한 감탄과 독서 습관 등을 읽다 보면 때론 우습고 때론 슬프면서 또한 감동스럽다. 물론 잘못 편집된 책이나 책장을 포장지로 사용하는 것에는 신랄한 비평을 날리고, 책을 빨리 구해주지 않으면 나무늘보라며 채근하기도 한다. 한편 2 세계 대전 , 물자가 귀한 영국의 사정을 안타깝게 여겨(미국의 죄도 대신하여) 통조림과 달걀, 나일론 양말 등을 챙겨 보내는 따뜻함으로 프랭크와 가족, 서점 직원들 모두와 우정을 나눈다.      


무엇보다 이 책의 감동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열정과 우정이다. 책은 그 안에 담고 있는 내용만큼이나 표지, 제본 방식, 종이의 재질과 활자의 폰트 등 물리적 존재도 중요하다. 아직까지도 전자책을 피하고, 특히 양장본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프랭키와 헬렌의 우정이 정말 부러웠다.      


영화 중후반에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대사를 칠 때면 꼭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계속 헌책방의 그리운 풍경이 떠올랐고, 의자에 앉아서 혹은 이불속에 웅크리고 책을 읽는 헬렌 이, 그녀가 책을 낭독하는 모습이 바로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친한 이의 글을 읽으면 목소리가 음성 지원되는 것처럼 70년 전의 작가와 서점 직원이 친근하게 생각됐다.      


새 책을 좋아하고 중고책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나도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마치 전 주인의 유령이 내가 읽어 본 적 없는 것을 짚어주는 듯”한 중고책을 읽고 싶어 졌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거나 메모를 하는 버릇 때문에 내 책은 중고로 팔 수 없는데, 나중에 어떤 애서가들이 내 책을 읽으며 동지애를 느껴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소설을 좋아하지만 <월턴의 생애>가, 영어를 못하면서 “인도지에 파란색 헝겊 제본으로 1905년판 원본이며, 면지에 잉크로 글씨 쓴” <옥스퍼드 판 영시선>까지 읽고 싶어 졌다.     


그런데, 옮긴이의 글을 읽다 울컥했다. 헬렌이 가난한 작가가 아니었다면 영국의 중고서점까지 책 주문할 일이 없었을 테고 이 책이 나올 수 없었겠지만, “중년이 끝날 무렵 어느 날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가” “나는 실패한 희곡작가였다. 나는 아무 데도 가지 못했고 아무것도 아니었다”라고 절망했단다. 영화를 보면서는 헬렌 이 영국에 가는 것으로 시작해 둘의 만남을 기대하다가 끝내 만나지 못해 울었었다. “헬렌  한프는 희곡작가로 시작해 방송 대본, 잡지 기사, 백과사전 항목, 어린이 역사책 등 닥치는 대로 글을 썼으나 단 한 편의 희곡도 무대에 올리지 못했고 어느 모로 보나 성공한 작가는 아니었다”라고 한다. 헬렌  한프의 대표작은 바로 이 <채링크로스 84번가>다. 방송작가로 시작해 홍보영상, 행사, 전시관 설명, 브로셔, 자서전 대필까지 닥치는 대로 글을 쓰고 있는 나도 이제 중년이다. 나도 실패한 작가로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 절망에 빠질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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