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그 남자의 방

망종, 자리물회

“제 방에 올라갈래요?”


처음 본 남자는 망설이듯 물었다.


“한라산 뷰가 정말 기막힌데...”


낮술을 마신 것은 한참 전이니

취한 것은 아니었다.

그곳은 제주도였고

음악이 좋았고

무엇보다

그 남자의 방에서만 볼 수 있다는

기막힌 한라산 뷰가 궁금했다.


남자의 말대로 그 남자의 방에서 보는

한라산 뷰는 정말 죽이게 좋았다.


제주는 내가 대학생 때 처음으로

친구들과 여행을 제대로 갔던 곳이고

방송작가가 되어 첫 번째 휴가지였다.


여름휴가에 가다가

올레길을 걸으러 제주에 갔을 때는

복잡한 게 싫어 6월에 갔는데

이후로도 계속 6월에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나는 제주에 가면

자리물회부터 먹는다.


봄에서 여름으로 넘어가는 이때

뼈가 아직 여물지 않은 어린 자리돔을

뼈째 썰어 야채와 양념을 섞은 다음

물을 부어 먹는 자리물회.


자리돔은 “돔”자 들어가는 귀한 생선 중에

가장 작고, 가장 못생겼으나

제주 특산품으로(최근에는 부산이나 울릉도 등지에도 있다 하지만)

제주를 대표하는 맛있는 생선이다.


자리물회는 원래는 조업 중에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이었으나

요즘은 한치물회와 함께

제주를 대표하는 여름철 별미가 되었다.

고추장이나 된장으로 양념을 하지만

원래 제주의 물회는 된장 양념이 좋다.


한치의 미끄덩하고 물컹한 식감보다

자리의 탱탱한 식감이 좋고

기름이 많지만 비리지 않고

된장 양념은 투박하면서도 구수하다.


어쩌다 친구들보다 하루 먼저 제주에 도착했는데

그동안 제주 현지인들이나 친구들이 이끄는 대로 다니다 보니

제주의 물회 맛집이 생각나지 않는다.

급하게 SNS로 수소문하니

제주 현지인이 글을 달아주었다.

다행히 숙소에서도 가까운 집이라 찾기 쉬웠고

바다가 보여 좋았다.


역시 현지인 맛집답게

야채보다 자리가 푸짐하고

제주 막장을 넣어 구수하니

서걱서걱한 얼음과 함께 씹히는 맛이 좋다.

호기롭게 제피잎과 빙초산 한 방울 떨어뜨려

맛나게 먹는다.

가게를 전세 내어 한낮에 한라산과 함께 하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현지인처럼 빙초산도 과감하게 한 방울~


자리물회에 한라산으로 낮술을 시작하니

그야말로 천국, 제주에 온 것이 실감이 난다.

바로 전 날까지 생방송에 시달리다가

왔으니 기분은 둥둥 떠다니는데

막상 무얼 해야 하나 할 일이 없다.


숙소도 바로 옆이고

차 렌트도 하지 않았고

낮술도 마셨으니

에라 모르겠다 바닷가를 좀 걷고

사진을 찍다가 까페에 들어간다.


쨍한 카페인에 낮술이 홀랑 깨버려

책을 읽다가 엽서를 쓰다가

사진을 보다가 룰루랄라 혼자 논다.


그러다 까페 사장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사람이 있다.

처음 만났는데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가 잘 통하고

그래서 평소 잘하지 않던

내 속의 이야기가 술술 잘 나오는...

그 까페의 사장이 그랬다.


그도 마찬가지였을까?

한참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데

문득 멋진 한라산 뷰를 보고 싶지 않느냐 묻는다.


날씨만 좋다면 제주도 어디서든

한라산이 보인다.

그러나 제주는 날씨가 좋지 않은 날이 많고

난개발 중이라 전깃줄과 카페와 건물이

멋진 뷰를 가리는 곳이 많다.


“사진은 안 돼요. 그냥 보기만 해요.”


어두컴컴한 계단을 올라가

남자의 방에 들어갔다.

뒤쪽 베란다의 통창을 밀어서 활짝 여니

한라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한라산과 나 사이에 귤밭만 있다.


“아…”


내 입에서는 탄성만 나온다.


그 이후, 6월 이맘때가 되면

한라산과 자리물회와 함께

그 남자의 방이 떠오른다.

사진 한 장 남지 않은 그 날의 한라산과

그 날의 대화, 그 날의 묘한 분위기까지

바로 어제처럼 선명하다.

숱하게 제주를 들락거렸는데 한라산의 사진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남자의 방에 다시 가고 싶은 건 한라산 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 본 남자가 자신의 방에

올라가자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이영애의 “라면 먹을래요”

같은 것이었을까?


영화 한 편이 이렇게

남녀의 커뮤니케이션을 복잡하게 만들 줄

허진호 감독도 몰랐을 것이다.


제주에서 석 달 살았을 정도로

제주를 좋아하고

현지 친구들은 물론 입도민 친구들도 많은데

제주에 간 지 한참 되었다.


오늘은 한라산 소주나 마셔야겠다!

자리물회도 없고

이야기가 잘 통할 뿐 아니라

자기만의 멋진 한라산 뷰를 가지고 있는

그 남자의 방도 갈 수 없으니

한라산 소주라도 마셔야

오늘 밤이 덜 외롭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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