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배와 처녀자리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 영화 <기생충> (2019년 봉준호)
오늘은 알람보다 2시간이나 일찍 일어났다.
침실에서 서재로 오는데 보니
어제 사다 놓은 엄마 커피가 이상하다.
‘앗, 엄마가 평소 먹던 커피가 아니었네!’
요일 특가 2천 원 할인에 빠져
엄마가 먹던 브랜드의 다른 커피를 사 온 게다.
오늘 나가서 바꿔 와야겠다.
커피는 취향대로 먹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엄마와 아빠, 나는 셋 다 커피 취향이 다르고
그걸 떨어지지 않게 챙기는 것은 내 몫이다.
별걸 다 걱정하고 준비하고 계획하는 처녀자리 성향이다.
프리랜서로 글을 쓰는 나는
프로젝트에 따라 보따리 장사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기 때문에
내 집, 내 서재에서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급하게 원고 수정이 들어오면
카페든 길거리든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글을 쓸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참 싫다.
몇 년 전에 큰마음먹고 서재를 갖춘 다음부터는
거의 카페에 가지 않고 서재에서 글을 쓴다.
프리랜서의 특성상 변수가 많은 나는
계획한 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동시에 진행하던 프로젝트의 마감이 겹치면 난감하기 때문에
매일 미세하게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하나가 틀어지면 전체가 엉망이 되는 악순환이다.
금성별자리 처녀자리가 이럴 때 특히 튀어나온다.
(금성별자리는 관계와 가치관에 영향을 미치는데
특히, 여성성을 나타내 여자에게는 태양별자리만큼 중요하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한국영화 100년 다큐>를 위해
봉준호 감독을 인터뷰했었다.
별명이 봉테일(봉준호 + 디테일)이라더니
감독님이 직접 카페를 정해 전화까지 해두었다.
카페 사장님은 영화 <기생충> 시나리오를 수정했던 곳이라고
자랑했고, 커피가 맛있었다.
‘오, 여기서 글 쓰면 나도 좋은 글을 쓰려나?’
내 서재에서 글을 쓰면 참고할 책들과 데스크 탑을 쓸 수 있어 좋은데
자꾸만 눕고 싶고,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게으름도 타파하고 봉준호 감독의 좋은 기운도 받자,
분위기도 바꿔 볼 겸, 카페에서 글을 써보려 했다.
동선과 커피맛, 주차 여부를 고려해
반포 병원 갈 때는 봉 감독님의 카페를
마포 프로덕션에 갈 때는 영화 <벌새>의 김보라 감독을 인터뷰했던 카페
집에 있다가 갑자기 글이 안 써질 때는
성북구 문화재단 부단장님이 소개해준 성북동 카페에 가자!
별걸 다 걱정하고 계획하는 처녀자리의 특성을 살려
카페까지 일일이 정해 두었는데
코로나 19 사태로 자발적 자가 격리에 들어가 미뤘다.
건강염려증도 처녀자리의 특성이다.
어제는 오후 편집 회의로 일주일에 한 번 외출하는 날이라
한의원에도 다녀와야겠다 싶었다.
편집 회의는 대개 오후 4시쯤 하고
한의원은 오가는 시간과 한 시간쯤의 진료 시간이 필요하니
오후 2시쯤 나가서 한의원에 갔다가 편집회의를 가야지 했는데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났다.
그 전 날 2-3시쯤 자서 9시나 10시에 일어나
108배하고 씻고 준비하고 밥 먹고
회의 준비 좀 하다가 나가려 했는데
알람보다 1시간 반이나 일찍, 7시 반에 일어났다.
여유 있게 모닝페이지를 쓰고 108배를 하다가
이러다 부족한 잠을 채우기 위해 낮잠이라도 잔다면
한의원은커녕 회의까지 늦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아예 일찍 준비하고 나가서 한의원에 갔다가
카페에서 글을 쓰고, 미팅을 가기로 한다.
일단 나가면 잠은 안 자겠지.
반신욕까지 하고 11시에 집을 나섰다.
병원에 갔다가 카페에 들러 3시간 정도
그 후 4시 미팅까지.
시간을 하나도 허투루 안 쓰고 완벽한 날이 될 거야! 완벽해!
생각하며 운전대를 잡자마자 아차, 월요일이지
마포 프로덕션에 갈 때 가려고 정해놓은 카페는 월요일에 쉰다.
또다시 초조해진다. 어쩌지, 어디로 가야 하지?
성북은 동선에서 멀다.
반포나 이태원에도 적당한 카페가 있지만 동선이 길어진다.
그러다 합정역 근처, 커피발전소가 떠올랐다.
한의원에서 마포 사무실 가는 중간이고
주차가 1대밖에 안 되지만 주차장이 만차라면
그 근처에 바로 핸드드립 커피가 맛있는 조커커피도 있다.
조커커피는 최근 마신 커피 중 단연 최고의 커피였으나
아쉽게도 작업하기에 좋은 분위기가 아니다.
그래도 2안이 될 수 있다.
그래 그렇게 결정했어, 하고 생각해보니 아차차
이어폰을 안 들고 나왔네.
다큐 가편 영상 확인해야 하는데 카페에서 민폐녀 되면 어쩌라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걱정이 다시 시작됐다.
그러다 어느 순간, 에라 모르겠다~
일단 시작하면 행동은 그 자체에 마법과 은총, 힘을 지니고 있다고
괴테가 말했지 않은가!
한의원에 가서 진료를 받고 커피발전소에 가니 주차장이 비었다.
카페에는 오늘따라 라디오가 틀어져 있고
손님들의 대화 소리가 시끄럽다.
이 정도면 이어폰 없이 영상을 봐도 괜찮겠다.
핸드드립 하라를 시키고 노트북을 켜는데
공포의 파란 화면.
요즘 노트북을 잘 쓰지 않으니 켤 때마다 업그레이드의 압박이 심하다.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커피발전소를 소개해주었던 나의 까미노 친구 은이가 생각났다.
문자를 하니 바로 답이 오길래 통화도 했다.
커피발전소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고 있는데 화, 수 담당이란다.
아쉽다.
요즘 담배와 커피에 대한 에세이를 열심히 쓰고 있단다.
한 시간 반 만에 노트북이 켜졌으나 일은 잘 마쳤다.
회의 준비를 하고 사무실에 가니
피디는 문상을 가야 한단다.
다큐 회의는 보통 4시에 시작해 7-8시쯤 저녁을 먹는 게 일상적이었다.
일이 많으면 저녁 먹고 더 일하고
일이 적으면 저녁 먹고 헤어졌었다.
‘앗, 배고픈데... 미리 말해 주지’라는 말을 삼키고
회의 마치고 피디를 병원에 내려준 다음
집에 오려니 딱 퇴근시간이라 차가 엄청나게 막힌다.
그러다 문득 화장품을 사러 가야지 하는 생각이 났다.
다시 이동 동선과 주차를 고려해
마트에 가서 엄마의 커피와 빵을 사기로 했다.
그런데 배가 고파 쓰러지겠어서 과자와 라면도 샀다.
떨어진 화장품을 잔뜩 쇼핑하고 기분 좋게 적립금도 쓰고
집에 오니 저녁 8시!
엄마가 주꾸미 볶음을 해 놓았다.
양껏 밥 먹고 좀 쉬다가 하루가 너무 길고 피곤했어서
자고 일어난 게 오늘 새벽 2시다.
아침 루틴을 하며 108배를 한다.
호흡에 신경을 쓰고
왼손 먼저 내밀고 당기면서 하나, 둘, 셋...
그리고 61부터는 61, 62, 63...
108배도 별 걸 다 정해 두고 그대로 하고 있다, 생각하며 기억났다.
“Plan is just plan!”
위대한 까미노 데 산티아고의 가르침.
계획을 세우는 건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108배의 디테일은 108배를 하는 과정 중에 하나씩 이루어지고
그 계획은 108배라는 목표로 수렴된다.
그리고 여유 있게 브런치를 쓰려고 파일을 열다 발견했다.
“약속이나 계획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말자 : 책을 읽거나 일을 더 할 수 있다!”
작년에 생활 습관 고치기를 위해 써두었던 글이다.
약속이나 계획이 어그러지면 하루를 망쳐버리고
기분도 엉망이 되는 못된 습관을 고치고 싶었다.
어제 하루 어떻게 생각하면 머피의 법칙처럼
이도 저도 계획대로 안 되었다.
예전의 어리석은 나였다면 하루를 망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다.
일찍 일어났으니 여유가 있고
여유 부리다 늦을까 조급해할 시간이 있다면
다른 대안, 카페 놀이를 할 수 있고
가려던 카페가 쉬는 날이어서, 노트북이 켜지지 않아서
오랜만에 친구와 통화를 했다.
저녁에 일이 일찍 끝나 배가 고팠지만
필요한 것들을 쇼핑했고 엄마의 맛있는 저녁도 먹었다.
108배와 한의원, 카페에서 글쓰기와 다큐 영화 미팅, 쇼핑까지
완벽하다 못해 성실하고 기분 좋은 하루였다.
계획을 세우고 계속 수정하는 건
충실한 하루로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지
계획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어제 하루를 디테일하게 돌아보니 아직 부족하지만
못된 습관 하나가 고쳐지고 있다!
“작은 변화가 일어날 때 진정한 삶을 살게 된다.”
(True life is lived when tiny changes occur.)
톨스토이의 말처럼 작고 미세한 변화가 생활을 바꾼다.
처녀자리는 계획한 대로 되지 않거나 약속이 어그러지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가장 효율적이면서 완벽한 일처리와 디테일에 강한 처녀자리가
최적의 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결국 그 스트레스 때문에 효율성이 떨어지는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엄청난 분량의 <전쟁과 평화>를 7번 고쳐 썼는데
19세부터 82세로 죽을 때까지 매일 일기를 썼다.
60년 동안 <파우스트>를 쓴 괴테는
생각이 필요할 때마다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제 “봉준호가 장르다”라는 찬사를 듣는 봉준호 감독은
얼마 전, 아카데미 4관왕에 빛나는 영화 <기생충> 스토리보드를 책으로 출판했다.
봉준호 감독은 어렸을 때부터 만화를 그렸고, 콘티를 직접 그리는데
그 콘티가 영화의 장면, 장면과 완벽하게 똑같아 놀랍다고 한다.
그 정도로 철저한 계획과 수정 속에 놀라운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조용한 방에서는 눕고 싶은 욕구가 자꾸 생겨
서울 시내 카페 4곳을 정해놓고
3,4시간 간격으로 옮겨 다니며 시나리오를 쓴다고 한다.
세 사람 다 디테일이 훌륭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처녀자리다.
그들도 하루 하루 충실히 보내기 위해
자신을 관찰하며 습관을 교정하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성공을 일구었겠지.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드는 처녀자리의 자세로
하루하루 충실하게 행복하게 108배를 하자!
*음 여기까지 쓰고 보니 너무 길다.
1,2차 퇴고하고도 길다.
처녀자리의 디테일은 살았지만
효율성은 떨어진다. 고쳐 써야 한다.
시간은 벌써 6시 반.
다음으로 미루고 일단 올리자.
금성 처녀자리와 태양, 달 천칭자리의
합리적 타결 방안이다.
**오늘 엄마 커피 바꾸러 가는 길에 카페 가서 은이도 보고
작업도 하고 오면 계획에 없던 일에, 동선도 너무 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