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배와 불면
나는 잠자고 싶어 하는 육체이며
그와 동시에 각성하려는 의식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잠>
까미노 데 산티아고에서 인사는 대개 “Buen Camino”로 시작해
“Are you OK?” 혹은 발은 괜찮은지 묻는 것으로 이어진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이 길에 왜 왔는가, 묻는다.
내 대답은 “심플(simple)하게 살고 싶어서”였다.
나는 “빨리빨리”를 외치는 메가 시티 서울에 살고
직업이 방송작가라 퇴근을 해도 퇴근이 아니었다.
방송은 빠르고 정확하게 진행되어야 하고
의사결정이 매우 빠른 만큼 책임져야 할 부분도 많다.
일주일에 한 번 생방송을 진행하다 보면
이번 주 방송의 촬영과 편집과 원고를 진행하면서
그다음 주 방송의 섭외 그리고 특집 기획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처리해야 한다.
그때 나는 방송작가 8년 차였기 때문에
두 세 프로그램을 하면서 홍보 일도 병행했다.
그러다 보면 여의도 안에서도
이쪽 프로덕션에서 퇴근해 저쪽 프로덕션으로 출근하고
낮에는 잠깐 틈을 내 강남을 다녀와야 하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몰아쳐 일하다 번아웃(Burnout syndrome)된 상태에서
산티아고로 날아간 것이었다.
1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 길을 그리워하는 것은
그 길에서 나는 매일 걷고 먹고 자는 일만 생각하며
그토록 꿈꾸던 심플 라이프를 살았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을 선물 받은 기분으로 행복했다.
요즘 이명과 불면증으로 고생하면서
다시 그 길이 그립다.
오늘은 오후에 다큐멘터리 방송 편집회의가 있다.
이번 주에 시사가 있으니
며칠은 바짝 긴장해서 편집을 마무리하고
원고를 써야 한다.
지난주 밤낮이 뒤집어져 아침 9시 10시까지도 말똥말똥 못 자다가
오후 4-5시까지 자기도 했다.
아침에 자고 오후 늦게 일하는 피디도 놀래서는
“아 목소리 쫌.... 정신 차리면 전화 줄래?”할 정도였다.
오늘은 오후에 편집회의 가기 전에
한의원도 가야 하는데
그러면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어제도 오후 5시쯤 일어났었다.
새벽 2시 넘어서 “지금 자지 않으면 위험해!” 불안했다.
결국 자는 둥 마는 둥 침대를 지키다
아침 일찍 7시 좀 넘어 일어났다.
알람 맞춰 놓은 시간보다 무려 1시간 반 이르다.
작가들은 대개 불면과 친하다.
책상 앞에 앉아있을 때는 떠오르지 않던 아이디어와 문장이
자려고 불 끄고 침대에 누우면 잘도 튀어나온다.
어떤 날은 정확한 문장과 구체적 상황이
선명하게 떠올라 핸드폰에 메모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러기 시작하면
메모장 → SNS → 뉴스 → 메모장의 무한 루프를 돌게 되고
내일의 일정과 합리적인 이동 동선을 고민하게 된다.
소위 머릿속으로 필름이 돌아간다.
대개 여러 가지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마감이 급한 일부터 천천히 진행하고 있는 일까지
우선순위가 명확해도 뇌에 떠오르는 생각의 순서는
그 우선순위를 따르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떠올랐던 생각과 문장은
일단 적어놓지 않으면 사라져 버리고
핸드폰이나 노트를 펼치면 잠은 달아나버리고 만다.
우리가 자는 동안 두뇌는
그동안의 일들을 분류하고 연결하여
중요도에 따라 삭제하거나 장기 기억과 단기 기억으로 나누는
일을 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런데 작가들은 무의식 중에 결합되고 창조된
중요한 아이디어나 문장을
의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언제부턴가 메모를 포기했다.
머리는 쉬어야 한다.
잠을 안 자는 건, 못 자는 건 아주 힘든 일이다.
침대에 누우면 귀에서 윙윙 소리가 들리는 이명과
싸우는 요즘 메모까지 하면 잠은 다 잔다.
그러다 갑자기 열두 시간 스무 시간
몰아서 자버리기도 한다.
위대한 창조력이여~
제발 내가 책상 앞에 준비되어 있을 때 튀어나오길!
무라카미 하루키는
마라톤과 글쓰기, 음악 듣기 등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부지런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직업으로 글을 쓰려면
불면과 친해지지 말고 숙면을 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아침 일찍 시작해
벌써 108배도 했으니
한의원과 편집회의 다녀오고
밤에 꿀잠 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