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그대의 진심을 알아줄 때
미국의류 회사로 가다 - 6 회
#디자이너의 수명이 끝나가고 있었으니
이탈리아에 가족이 있는 그는 1년에 2~3번은 길게 휴가를 다녀오곤 했었다. 가는 김에 유럽도 한 바퀴 돌면서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영감을 받고 새 시즌을 위해 다양한 옷들을 매번 뽑아냈었다. 아무래도 패션은 유럽이 제일 빠른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 회사에 계속 적응하고 스타일들을 잘 선도하는 줄 알았는데 가끔 제임스와 셸리가 한통속이 되어 소곤소곤 그의 뒷말을 하는 것은 단지 그들만의 작은 반항인 줄 알았다.
우리 회사가 새롭게 시도하는 페미니즘 스타일들이 단골들에게 반응이 좋은 줄만 알았다. 그런데 그들의 소곤거림을 자세히 들어보니 사장님이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를 새로 영입해 오면서 준비한 특별 제작된 원단들과 부속 등이 재고가 많이 남아있고 매장에도 그가 디자인한 옷들만 안 팔려서 골치가 아프다는 것이었다. 너무 충격이었다. 설마 저 제임스가 능력 많은 페데리코에게 샘이 나서 저렇게 말을 지어내는 것은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요즘 그의 표정이 좀 공허해 보였다. 처음 이 회사에 와서 우리에게 큰소리치며 잘해볼 테니 기대해 달라는 그때의 모습이 어느 순간 보이지 않는다. 초조해하고 표정이 굳어서 요즘은 농담도 잘하지 않는 눈치다. 하긴 이 회사의 메인 디자인들은 편안함을 추구하는 백인 상류층의 스타일이다. 성공한 중년들이 여행을 가거나 집에서 편하게 즐기는 그런 부류의 옷들, 언제나 유연제로 사전 세척을 해서 옷 자체가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옷감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페데리코의 하늘하늘한 드레스와 조각조각이 많은 점퍼는 살짝 그가 전에 일했다던 구찌와 몽클레어의 캐나다산 구스 재킷을 닮아가고 있었으니 우리 회사 분위기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런 명품회사에서 데려온 것으로 볼 때 우리 사장님도 처음에는 그렇게 비상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을 게다. 하지만 우리 브랜드를 찾는 고객들은 이 회사만의 스타일을 고수하였고 갑자기 구찌 비슷한 옷들은 솔직히 어색함 그 자체였다.
당시 2월 중순인데 엊그제 휴가를 떠난 페데리코는 그때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한 번은 제임스에게 우스갯소리로 ‘페데리코는 이탈리아에 가서 구정 (영어로 차이니스 뉴 이어)를 보내고 오느냐’고 농담할 정도였다. 언제나 그는 구정 때쯤 휴가를 보내고 오는데 올해는 유난히 휴가가 긴듯하다. 중국에서 이상한 바이러스가 출몰해서 난리던데 설마 그가 이번에는 이탈리아만 있다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 심상치 않던 분위기는 결국 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휴가 간 틈을 타서 대표님이 그를 해고해 버렸고 다른 여자디자이너를 새로 고용했다고 한다. 그 여자 디자이너도 예전 우리 회사 초창기일 때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그럼 페데리코는 작별 인사도 못하고 이탈리아에 남아 있을 수밖에, 세상에 이렇게 아쉬울 수가 있을까.
웬만한 직원들은 우리 회사에서 떠나는 날 "Farewell (작별)" 이란 제목으로 길게는 10줄 아니면 서너 줄 정도의 인사를 써서 이 메일을 보내주던데 페데리코는 그럴 여력조차 없나 보다. 어느 때보다 우리 회사에서 다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고 아이디어를 쥐어짰는데 그 결과물은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갑자기 해고를 당하다니. 그 후 자상했던 그의 마음씨는 다 얼어붙었는지 우리에게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물론 그의 마음이 백 프로 이해되지만 5년 동안 같이 일했던 우리 사이가 수포로 되는 거 같아 아주 속상하고 아쉬웠다. 며칠을 그렇게 기다리다 아~ 그가 쓰지 않는다면 내가 인사를 해도 되겠지 하고 그의 이메일 주소에 "작별"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내 마음을 짧게 함축하여 써보았다.
굿바이 페데리코. 당신과 일하는 동안 너무 즐거웠어요. 함께 일하던 순간들을 잊지 못할 거예요. 우리 (나라고 쓰려다 고쳤다) 모두 당신을 많이 그리워할 거 에요. 혹시나 다른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함께 일하고 싶어요. 좋은 데에 일하게 되면 나를 꼭 다시 찾아주세요. 아무쪼록 앞으로의 행보에 행운이 가득하기를 빌어요.
- 비비안’
너무 부담스러운 멘트는 아니기를 바라며 이메일을 보내기 전 읽고 또 읽어보았다. 이 한국 여인네가 언제나 스위트하게 대하더니 다른 흑심이 있나 하고 의심하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고치고 또 고쳐보았다. 플라토닉 같은 혼자만의 상상 속 썸을 그리며 일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니 하루하루가 다 행복했었고 이제 다시 그를 같은 회사 안에서 볼 수 없다는 게 실감이 가지 않았다. 그동안 그렇게 감사하게 다니던 회사가 하루아침에 너무 썰렁해졌다. 그를 흉보던 제임스와 셸리가 다 꼴 보기 싫었다.
그러다 중국 우한에서 창궐했다는 코로나 바이러스는 점차 전 세계를 넘나들며 전염성이 심각해졌다. 마스크 안 껴도 된다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을 칼같이 잘 듣는 미국인들은 결국 항복을 한 채 2020년 3월 21일 자택격리를 선언하여 모든 회사와 학교, 사회가 다 닫히는 일이 발생했다. 그렇게 난 몇 개월 동안 집에서 오래간만에 쉬면서 충전도 하고 가족들과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