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2일 자정
“엄마, 왜 나한테는 안 나타나는 거야, 언니들 집은 그렇게 먼데도 자주 놀러간다면서, 왜 아빠도 있는 우리 집엔 안 오는 거야?”
엄마가 잠들어 계신 메모리얼 홀에 갈 때마다 나는 묻는다. 언니들 꿈엔 자주 나타난다는 엄마를 나는 돌아가신 뒤 7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폐암 수술을 마지막으로 받으시고 떠나시기까지 1년,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늘 새벽에 나가 밤늦게서야 집에 돌아왔다. 극심한 통증으로 누워서 자지 못하고 의자에 앉아 견디고 계신 엄마를 보는 것이 힘들어 더 늦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설핏 잠든 엄마를 깨울까싶어 발소리 죽이고 불도 켜지 않은 채 서둘러 옷을 벗을 때면 “윤경이… 왔니?” 하는 힘없는 목소리가 들리곤 했다.
엄마가 돌아가시는 순간에도 나는 곁을 지키지 못했다. 뭐 그리 중요하고 대단한 일을 한다고 출장을 갔는지, 엄마는 “네가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걱정 말고 다녀와라.” 했지만, 가선 안 되는 길이었다.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 “엄마, 일주일이면 오니까 그 때까지 조금만 참고 계세요” 했다. 수화기 저편의 엄마는 말했다. “너는 어떻게 그렇게 이기적이니. 너무 힘들다…….” “괜찮다, 다녀 오거라” 했던 엄마는 “고통 없는 하늘나라로 가고 싶다.”고 하셨다.
그 때만 돌아섰어도 임종을 지킬 수 있었다. 불길한 느낌을 느끼면서도 나는 비행기에 올랐고, 비행기가 목적지에 닿기도 전 엄마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비행기 착륙과 동시에 휴대폰 전원을 켰을 때 거짓말 같이 전화벨이 울렸다. ‘아, 엄마!’ 그렇게 여러 차례 사인이 있었건만, 나는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했고 엄마는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갔다.
나는 엄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것도 안타까웠지만 무리해서 진행한 수술에 대한 후회가 더 컸다. 그렇게 좋아하는 여행도 마음껏 다니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 얼굴도 보면서 편안하게 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는데, 어렵다는 수술을 부탁해서 강행한 것이 엄마를 더 힘들게 한 게 아닌가 자책했다.
오늘 여행 일정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이부자리 속에 들어가 앉는데, 등 뒤로 바람 한줄기가 느껴졌다. 전설의 고향에서 봤던 서늘한 냉기가 어깨를 감쌌고 순간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분명 히터 바람이 나오는 훈훈한 방이었고 창문 열린 곳도 없는데, 알 수 없는 기운에 내 몸은 굳어버렸다. 등 뒤에 누워 계신 아버지를 돌아보려 했으나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엄마... 내일이 아버지 생신이라 아버지를 보러오셨구나!’
나는 그렇게 믿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하며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꿈에 엄마 안 나타났어?”
아버지는 별다른 느낌을 못 느끼신 듯 조용히 타이르셨다.
“아무 말 하지 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말 하지 말고 조용히 보내자. 내 마음이 그렇다.”
여행을 함께 한 일행들이 함께 한 아침 시간, 인솔자가 “오늘 생일 맞으신 분이 계십니다.” 하며 아버지를 앞으로 청하셨다. 초코파이에 불을 밝히고 아버지 얼굴까지 그림으로 그린 멋진 케이크가 등장했다.
엄마가 떠나신 뒤 생일이나 결혼기념일과 같이 특별한 날이면 아버지는 더 우울해 하셨다. 나도 엄마 생각하며 눈물짓는 아버지 보는 게 힘들어 굳이 지방에 있는 언니들 불러올리지 않고 둘이서 조용히 보냈었다. 내년 팔순 때는 뭔가 특별한 시간을 가져야겠다 생각했는데, 이렇게 따뜻하게 축하해 주시니 미리 잔치하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는 목이 메는 듯 가슴 속 이야기를 다 못하시는 듯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매 순간 우리 부녀의 편의를 봐주시고 배려해 주시는 것이 혹여 함께 하는 다른 이들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을까 송구스러우면서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엄마, 어제 밤에도 나한테 얼굴 안 보여준 건 두 분이서 시간 보내려고 그런거지? 나한테 섭섭해서 그런 거 아니지, 응? 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