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2월 10일 밤11시
330년 역사의 스카유 온천물에 몸을 담궜다. 이 곳은 강한 유황성 탕으로 일본국민온천 제1호로 지정된 곳이다. 치유효과도 있어 신경통, 류머티즘, 위장병, 부인병, 통풍, 당뇨, 피부병, 빈혈, 변비 등에 효험이 있다 했다. 이 곳 원천수에 달걀을 넣으면 안에 있는 노른자부터 익는다 한다. 온천수에서 올라온 물안개로 실내가 자욱해 맞은 편에 있는 이 얼굴을 식별하기도 어려웠다. 적막함 속에서 내 몸에 스미는 온천의 열기를 느꼈다. 온천 여행 중 알게 된 새삼스런 사실 하나, '암세포는 42도 이상에서 고온에서 죽는다.' 남들에겐 무심히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박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1982년, 엄마가 유방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왼쪽 가슴을 깊숙이 도려내는 큰 수술을 받았고, 그 후에도 암세포는 뼈로 갑상선으로, 폐로 옮겨 다니며 엄마를 괴롭혔다. 2009년 3월 세상을 떠나실 때까지 26년이 넘는 세월동안 입퇴원을 반복하며 수술과 방사선치료, 약물치료를 받으셨음에도 나는 암이라는 병에 대해 무심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다는 S대병원, 명의로 소문난 주치의에게 엄마를 맡겨뒀다는 이유로 입시에, 직장 일에, 연애에, 내 할 일에만 몰두했다.
엄마 모시고 온천 한 번 가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때렸다. 치유효과가 있는 스카유 온천에선 물에 계란을 넣으면 노른자부터 익을 정도로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열을 낸다 했다. 계속 수술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단 일주일이라도 온천에 왔더라면 어땠을까. 그렇게 좋아하시던 여행이나 실컷 다니시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엄마의 평온한 삶을 위해 과연 나는 어떤 노력을 했던가 자책이 밀려왔다. 이것이 자식의 한계이지 싶었다.
엄마는 피부미인이었다. 땀구멍 하나 없이 팽팽하고 희었고 흔한 주근깨 하나 없었다. 아빠가 대학시절 11대 11 미팅에서 엄마를 만났을 때 가장 먼저 눈길이 간 곳이 풍만하고 흰 허벅지였다고 한다면 선정적인 표현일까?
엄마는 손도 예뻤다. 그러나 그 길고 흰 손가락에 늘 들려 있던 건 네 딸들 먹일 과일과 야채로 가득한 검은 비닐봉지였다. 본인 손엔 물마를 일 없으면서도 딸들이 걸레를 빨거나 설거지 하는 것을 싫어하셨다. 내가 입댄 컵을 싱크대에 던져놓는 게 미안해 수도꼭지라도 돌리려 하면 “손 망가진다 하지마라, 시집가면 원 없이 한다.”말리셨다. 그 시간에 피아노를 치라 하셨다.
엄마 키는 165로 비교적 큰 편이었는데, 아빠도 키가 크셔서 우리 딸들은 다 키가 크다, 나만 빼고. 언니들 셋이 165를 넘어선 반면 160 고지를 뚫지 못한 나를 두고 엄마는 꽤 과학적인 논거를 대셨다."완두콩의 우성과 열성 형질 비율이 3:1 이잖아."
암은 가족력이 있을 경우 발병확율이 높다해서 걱정했는데, 그 불행은 네 딸들 중 가장 희생적이고 착한 둘째에게 닥쳤다. 자식을 셋이나 낳아 기르느라 고생, 박사학위를 두 개나 받느라 사서 고생, 남편이 있는 강릉과 본인 직장이 있는 서울을 오가며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던 언니는 지난 해 ‘여포성 림프종’ 판정을 받았다. 수술이 불가능한 이 병은 암과 함께 남은 생 살아간다는 마음으로 정기적으로 화학치료를 받는 것 외엔 다른 방법이 없다 했다.
언젠가 언니 등에 로션을 발라주다 놀란 적이 있다. 양 손으로 언니 등을 마사지하듯 문지르는데, 손바닥에 닿는 피부 느낌이 엄마와 너무 비슷했다. 엄마 등을 긁어드릴 때면 늘 엄마는 "세게, 더 세게!”를 외치셨다. 엄마 요구대로 강도를 높이다 보면 새하얀 등에 붉은 줄이 사정없이 그어지고, 겁이 난 나는 손바닥에 열이 나도록 다시 문질러 그 줄을 지워내곤 했다. 그 때 느낌이 그대로 살아나며 소름이 돋았었다. 엄마를 빼닮아 언니가 병을 물려받은 걸까? 언니가 “피곤하다, 임파선이 부었다”할 때 나는 왜 병원 가라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을까. 충격 받은 아빠를 보면서 엄마가 이 세상에 안 계신 것이 처음으로 다행스럽게 느껴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