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의 끝, 그리고 새로운 시작

재수생부터 연대생까지

by 블루퍼

수능이 끝나고 일주일. 일주일 간 지옥에서 천국까지 모두 경험했다. 죽었다 살아났다는 것이 더욱 맞는 표현이겠다.



Day 1. (11. 17)

수능, 바로 그 날.


수능 당일에는 참 정신이 없었다. 전 날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 시간 반 동안 침대에서 한숨을 쉬며 뒤척였다. 그렇게 수면 시간은 고작 3시간. 이른 새벽에 도시락을 나눠주시며 담임선생님이 몇 시간 잤냐고 물어보셨다. 내 대답을 듣고는 수능 전 날 치고 3시간 정도면 나쁘지 않게 잔 것이라고 말하며 어깨를 토닥여주셨다. 함께 웃었지만, 나와 선생님 모두 웃는게 웃는게 아니었다. 수능장으로 가는 버스가 길을 잘못 든 덕분에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 때 나는 몰랐지만, 나중에 수능장에 엄마 아빠가 오셨다고 한다.)

수능장 안은 절반이 우리 학교였고, 우리 고사실의 절반이 친구들이었기 때문에 마치 모의고사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긴장되거나 떨리는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수능장은 수능장이었다. 고사실과 학교 전체에 감도는 긴장감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무거운 분위기였다. 차마 수능 과정은 말을 할 수 없다. 지나치게 신경을 집중한 탓인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 제2외국어까지 시험을 보고 나오니 해가 이미 져있었다. 해가 뜨기 전 학교를 나서서 해가 지고 나서 수능이 끝났으니 참 긴 시간이었다.

수능이 끝나고 켠 핸드폰에는 하나의 카톡만이 와있었다. 한창 외국어 시험을 보고 있을 시간, 엄마가 보낸 장문의 편지였다. 애초에 수능을 그리 잘 보지 못한 상황에서 엄마의 카톡을 보니, 한없이 죄송한 마음 뿐이었다. 정말 아이유의 노래 가사처럼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었고, 친구들이 나가자고 재촉하는 상태였기에 흐르지 못하게 살짝 웃어보일 뿐이었다. 오히려 수능 보기 전보다 더 많은 생각과 감정이 교차했다. 이 성적으로 대학을 쓰기야 하겠다만, 원하는 데는 절대 못 쓸 것 같고 반수가 맞을 지, 재수가 맞을지 고민하는 것부터 내일 엄마 아빠 얼굴은 어떻게 보며, 그 동안 나한테 큰 기대를 걸었던 친척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미안함과 부끄러움에 면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어찌 되었든 수능은 끝났고, 오늘의 성적이 좋지 않더라도 어제의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엄마도 오늘 하루는 정말 수고 많았다고, 오늘은 맛있는거 먹고 학교 들어가라고 하셨고, 수능 전날 저녁부터 수능이 끝날 때까지 식사는 커녕 입에 뭘 넣지를 않았기 때문에 뭐라도 먹어야할 것 같았다. 친구와 학교 앞 치킨집에서 치킨을 먹고 들어가기로 했다. 치킨집에서 치킨을 기다리니, 분명 우리 학교 학생으로 보이는 아이와 그 부모가 함께 들어왔다. 그들은 내 눈 앞에서 보이는 테이블에 자리했다.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신세한탄을 하고 있던 도중 눈에 들어온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내 앞 테이블에 앉아있던 그 아이가 엎드려 우는 것이었다. 그 심정이 너무나도 이해가 갔다. 아마 나도 엄마 아빠와 함께 밥을 먹으러 갔다면 테이블에 엎드려 우는 것은 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치킨을 먹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겨우 학교에 들어왔다. 그동안 피곤했던 만큼 바로 잠들 줄 알았지만, 머릿속이 복잡해서인지 쉽게 잠에 들 수 없었다. 게임을 해도 게임에 집중할 수 없었다. 가채점 따위는 내일의 나에게 넘기기로 하고 그렇게 수능 날을 마무리 했다.




Day 2 (11.18)

충격과 공포의 가채점, 그리고 눈물.


다음날 아침이 밝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일어나 샤워를 하고, 가채점을 위해 수험표를 들고 학교에 나섰다. 그래도 기대는 있었다. 국어는 어렵지 않았고, 사회탐구는 나쁘지 않았고, 수학도 나름 괜찮게 푼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메가스터디에 들어가 가채점표에 쓴 답안을 옮기고 나서 기절하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수학과 사회문화, 그리고 한문을 제외한 모든 과목에서 지금껏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점수를 받았다. 그때부터 손이 마치 알코올 중독자의 금단현상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이정도면 서울대는 커녕 연고대도 힘들 것 같은 점수였다. 수시 상담할 때 안정적으로 성대 하나 쓰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수능으로 연고대는 해볼만 하니, 수시에서 서성한 밑으로는 쓰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나를 찾아가 뺨을 사정없이 갈기고 싶어졌다. 역시 경험과 지식이 합쳐진 선생님들의 말을 듣지 않아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을 해봤지만, 이미 늦었다. 마침 서울대와 고려대 1차를 떨어졌던 상황이라 남은 건 연세대 논술 뿐이었지만, 연세대 논술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힘든, 말 그대로 로또였기에 기대를 접었다. 대체 뭘 믿고 수시 한 장을 버린건지 온갖 후회와 미련이 밀려들어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수능 다음 날은 수능 가채점 결과만 제출하고 집에 가는 일정이었다. 엄마 얼굴을 보자마자 다시 코끝이 찡해졌다. 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인 듯 했다.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수능 후기 아닌 후기를 포함한 시답잖은 이야기를 계속 나누며 밥을 먹으러 갔다. 하지만 얼굴 표정은 숨겨도 손은 숨길 수 없었다. 밥 숟가락을 드는데 미친 듯이 손이 떨렸다. 대체 왜 그런 건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손이 계속 떨리는 탓에 제대로 밥도 먹을 수 없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들어와서 조용히 방에 들어왔다. 뭐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이미 주사위는 내 손을 떠났고, 수시도 희망이 없었다. 그날 밤은 유난히도 조용했다.




Day 3 (11.19)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간 기적.


기분 전환 겸 향후 거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삼촌을 찾아가기로 했다. 엄마 아빠는 부모의 욕심으로 서성한 자체가 탐탁치 않았다. 하지만 한 다리 건너 있는 삼촌의 입장에서 반수가 나을지, 재수가 나을지, 한 번 더한다면 문과로 다시 가는게 맞을지 등등을 살펴보면 뭔가 다른 결론이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향했다. 맥없이 지하철에 실려가다시피 하면서 친구와 카톡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그럼 연대 논술 떨어졌나 확인해보라고 했다. 분명히 나는 12월 중 발표로 알고 있었기에 무슨 소리냐며 일축했다. 그러자 친구가 연세대학교 입학처에 들어가 수시 일부 전형 최종합격 확인 링크를 보내주었다. 한 번 해보라는 친구의 말에 그게 될 리가 없다고 바로 불합격 뜰 걸 뭐하게 하냐고 이름과 수험번호를 넣고 아무 생각도 없이 누른 그 순간. 내 삶은 완전히 달라진 듯 했다.

파란색으로 도배되어있는 학교에서 붉은 글씨로 '최종 합격'이라고 쓰여있는 것을 보고 지하철에서 짧은 탄식을 내뱉으며 주저앉았다. 낙타가 결국 바늘 구멍에 들어가고야 말았다. 다시 한 번 온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떨리는 가슴과 손을 부여잡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하철이라 작은 목소리를 벌벌 떨며 "엄마... 나 연대 논술 붙었어요....."라고 말한 후 이어진 3초 간의 정적. 고작 이틀이었지만, 그 어떤 때보다도 깊은 시름에 빠져있던 우리를 수렁에서 건져 올린 시간이었다. 축하한다는 말과 정말 잘 됐다는 말과 함께 들리는 약간의 울음소리. 그렇게 엄마와의 전화를 끊고 나서 합격하면 연락하고 싶었던 사람들한테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 전에 소식을 들은 이모들이나 사촌형, 누나들이 먼저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담임선생님께 연락을 드리니, 정말 수고 많았다고 진짜 어려운 전형인데 통과했다고 축하한다고 말하시며, 우리 학교 3학년 첫 번째 최종합격자가 된 걸 축하한다고 말씀해주셨다. 다른 수시 전형을 전부 날려먹고 수능까지 망했기 때문에 연세대 논술 전형 합격은 곧 연대 입학과 같은 말이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최종 합격을 한 셈이다.

그렇게 많은 가족과 친구들의 축하를 받으며 당당하게 할머니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는 잠시 외출 중이셨고, 삼촌이 가장 먼저 나를 반겨주셨다. 그리고 잠시 뒤 이모와 함께 할머니가 집에 돌아오셨고, 할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흘리셨다. 고3 1년 동안 수능 준비 하면서 딱 두 번 크게 울었는데 그 중에 한 번이 할머니 앞이었고, 할머니는 내가 가장 고생하고 있었던 것을 몸소 알고 계셨다. 그렇게 가족들이 작게 모여 밥을 먹으며 축하를 받았다. 뒤이어 나를 데리러 오신 엄마와 아빠도 내 얼굴을 보시고는 크게 안도의 한 숨을 내쉬셨다. 그렇게 단 몇 시간 만에 온 집안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 것이다.




Day 4 (11.20)

배부른 고민과 마지막 한 마디.


가장 큰 문제가 해결되니 이제 배부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자격증을 따야 앞으로 도움이 될지 고민하고, 어디로 여행을 가서 뭘 할지 생각해보고, 당장 저녁으로 뭘 사달라고 할지 고민했다. 드디어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미뤄뒀던, 수능 이후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생각들을 하기 시작했다.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오랜만에 할아버지가 계신 납골당에 다녀왔다. 그곳에 가는 길에 돌아가신지 15년 만에 이제서야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하신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동혁이 잘 키워라."

그 동안 할아버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어왔지만 할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듣지 못했었다. 물론 과정은 순탄치 않았지만, 결과론적으로 성공한 부모가 된 엄마와 아빠는 마치 할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냈다는 듯이 내게 그 말씀을 해주셨고, 다시 한 번 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많은 손자 손녀 중 가장 예뻐하셨던 막내 손자를 위해 다시 한 번 큰 선물을 주신 듯 했다.




Day 5~ (11.21~)

모든 것이 끝나버린 고3


학교에 돌아가니 나는 말 그대로 미친 놈이 되어있었다. 71:1의 경쟁률을 뚫고 가장 먼저 입시에 성공한 사람이었고, 또 동시에 가장 재수없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논술 합격의 이야기를 무용담을 늘어놓듯 풀었다. 이미 3학년부에 보고가 된 것인지, 3학년 모 국어 선생님은 벌써 나를 '연대생'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수능 점수가 잘 나와 고려대에 안정적으로 합격이 예상되는 친구는 벌써 고대 응원가를 부르며 우리만의 작은 '연'고전을 치르고 있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마침 기말고사 첫 교시가 공부 안 한지 1년이 넘은 프랑스어였기 때문에 생전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답을 3번으로 찍었다. 시험 시작 2분만에 모든 마킹을 마치고 엎드릴 때의 희열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기분은 그것으로 끝. 나머지 과목들은 최대한 풀어보려고 노력은 했다. 하지만 이미 수능은 끝났고, 수시로 재수를 할 수도 없었기에 기말고사에 대한 생각은 저 멀리 날려보낸지 오래였다. 그래서 '한 번 덮은 시험지는 다시 펼쳐보지 않고, 한 번 손에서 떨어진 펜은 다시 잡지 않으며, 설령 실수라도 한 번 찍은 마킹은 수정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충 문제를 풀어나갔다.

그러는 도중에 새로 주문한 맥북까지 도착했고, 내 삶은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함을 보여주었다. 부담이 없으니 친구들과 소소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웃고, 새로 산 노트북을 만지작대며 감탄을 금치 못하고, 미뤄뒀던 게임을 하며 재미를 느꼈다.




Fin.

끝은 새로운 시작


고작 3일만에 지옥에서 천국까지 모든 걸 경험해봤다. 말 그대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회생한 느낌이었다. 그동안 돌린 염주와 올린 절이 몇 번인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기도했고 간절히 바라왔다. 그리고 나름 열심히 노력하기도 했다. 물론 과정은 몹시 힘들었다. 지난 3년을 떠올리면 참 고생 많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 무엇보다도 달콤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에 가졌던 연세대 언론홍보영상학부의 꿈을 이루어냈으니 말이다. 게다가 다른 전형은 전부 떨어진 상태에서 마지막 남은, 그것도 기대조차 하지 않던 전형에서 합격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정말 운 하나는 좋았던 것 같다. 다시 한 번 모든 것에 감사드리며, 아직 남아있는 친구들의 무운을 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나의 할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대신하여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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