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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Dec 09. 2021

언니의 식탁

사. 사. 모 공존 일기

오늘 저녁엔 엄마가 외출하는 날.

다 큰 딸과 아들을 둔 덕에 이제는 저녁에도 가끔 외출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화장실에 간다고 휭~하고 가버리려는 딸을 불러 세워 말한다.
"오늘 저녁에 엄마 나가니까 3호랑 밥 차려먹어."
"응. 근데 엄마 오늘 나 학원 빠지면 안 돼? 2호는 맨날 빠지잖아. 나 오늘 힘들단 말이야"
에효. 그럼 그렇지. 공짜는 없다. 협상이 필요한 때다.
"근데, 1호야. 너는 보강을 따로 할 시간이 없잖아. 2호는 시간이 너보다는 여유롭니까 부탁한 거고."
"아냐. 나 내일 학교 끝나고 바로 학원 가면 돼."
"그래" 마지못해 승낙한다.
항상 언제나 동생에게 모든 사랑을 빼앗긴다고 생각하는 1호는 조금이라도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 강렬하게 항의하는 편이라 학원 가기 싫어서 하는 핑계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넘어간다.
"이제 엄마 나간다." 나간다는 소리에 막내가 엄마 가지 말라고 붙든다. 근데 저 멀리서 한층 밝아진 목소리톤으로 1호가 막냇동생을 다정하게 부른다.
"언니가 놀아줄게~"
ㅎㅎ 어찌 됐든 행복한 협상이다. 큰딸의 기분도 풀고 나도 편하게 외출하니 윈윈이다. 버스를 타고 간다. 그리고 잠시 후, 한 장의 사진이 그녀의 인스타에 올라온다.

동생들을 위해 그녀가 차린 밥상. 소중히 모셔둔 1등급 등심 두 덩이를 가차 없이 제공해버리는 클래스. 제대로 구워 먹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동생들 챙기는 갸륵한 마음이 기특해 고맙다는 댓글을 단다.

저녁 모임 마치고 돌아오니, 사정을 모르는 아빠에게 큰 딸이 혼나고 있다. 그 비싼 고기를 다 먹었냐고... 철없는 동생들은 거든다.
"아빠. 그리고 고기가 안 익어서 피가 막보이고 그랬다니까."
1호는 동생들을 위해 자기가 애쓴 것도 모르는 아빠가 야속하고 옆에서 거드는 동생들이 미워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가만두면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외출하느라 1호한테 밥 차려 먹으라 시킨 거라고 화내는 남편에게 한마디 한다. 하지만 남편은 애들 살이 너무 찌는데 어쩔 거냐며 더욱 언성을 높인다.

일단 1호님 마음을 다독이고 조용히 설거지를 한다. 언니의 화려한 식탁은 의도와는 달리 억울한 눈물의 연속극이 되었지만 우리 1호님이 마음만 먹으면 이리 친절했었지 다시 옛날의 그녀의 훈훈했던 모습을 상기시키는 훈훈한 이벤트로 내게 남았다.

'1호야. 레어 스테이크도 괜찮아. 배탈 안 났으니 된 거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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