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딸 친구 엄마들의 모임, 사. 사. 모(네 명의 아이와 네 명의 엄마)가 모이는 날. 오래간만에 시내에 나간다. 점심을 먹고 도착한 명동은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한창이다.
백화점 입구에서 QR을 찍고 휴대폰 카메라를 보니 요정들과 트리가 짜잔 하고 화면에 나타난다. 2022년 최첨단 연말은 달라도 많이 다르다.
미디어 아트가 된 모네의 그림
명동 그라운드 시소에서 본 <모네 인사이드>는 4면의 벽 전체와 바닥까지 캔버스가 되어 그림이 움직이는 영상으로 된 미디어아트다. 그림과 설명, 음악이 하나가 되어 끊임없이 현란하게 움직인다. 살아있는 그림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며 설명과 함께 보이니 모호하고 어렵던 그림이 하나의 영화처럼 이야기가 되어 쉽게 다가온다. 신선하고 재미있는 경험이다.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모네가 이 모습을 봤다면 뭐라고 했을까.
명동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명동성당의 야경
엄마들과 신나게 명동 구경을 하고 돌아올 즈음, 근처에 와 있다는 3남매와 남편을 만나 명동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 명동성당의 미사는 역사의 긴 세월을 견뎌서 일까. 같은 내용, 같은 음악으로 미사를 드려도 왠지 모를 숭고한 깊이와 전율이 전해진다.
미사를 마치고 나오니 멋진 야경이 펼쳐진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사진을 찍고 추억을 남기느라 상기된 표정이다. 그간 코로나로 잃어버린 연말의 설렘을 다시금 찾은걸까? 나도 덩달아 신이 나서 아직까지 동심을 간직한 사랑스러운 막내와 남편과 함께 열심히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다. 성당의 언덕길을 내려오다 문득 깨닫는다. '큰 아이들은 어디 갔지?' 알 사람들은 알겠지만 중학생 아이들과 사진 찍기는 난이도 최상의 가족 미션이다. 같이 찍는 것은 벌써 포기한 지 오래. 두리번두리번 찾다 보니, 저 멀리 시커먼 그림자 둘이 보인다. 큰 아이들의 짜증 섞인 시선이 눈에 훅 들어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나대로 찍던 사진을 얼른 찍고 한마디 한다. "밥 먹으러 가자~!" 굳었던 아이들의 표정이 편안해진다.
화려한 백화점의 전광판
명동 거리는 북적북적한 인파들과 왁자지껄한 길거리 음식 좌판들, 빼곡한상점들로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은 듯했다. 속전속결로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소화시킬 겸 멋지다고 소문난 백화점 전광판을 향해 걸어간다. 건물 벽면에 번쩍이는 현란한 빛으로 화려하게 연출한 영상에 현혹되었는지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수십 번 반복되는 화려한 영상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순식간에 만들어내 현실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잊게 한다. 나도 잠깐 영상에 빠져본다. 사진을 찍고 영상을 녹화하고. 몇 분이 흘렀을까. 검은 형체의 아들이 얼굴을 푹 숙이고 복화술로 귀에 속삭인다. "다리 아프다는데 엄마는 꼭 이걸 봐야겠어. 도대체 언제 갈 거야?"
쨍그랑~환상이 깨지는 소리다. 역시나 아름다운 순간은 찰나일 뿐. 아들의 거센 항의로 화려했던 명동 나들이는 짜증과 원성만 잔뜩 들은 채 쓸쓸한 퇴장을 하고 말았다.
짧지만 화려했던 시기는 갔다.
눈부시게 화려했던 명동의 불빛을 뒤로 한채 터덜터덜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오늘 나는 몇십 년 만에 명동을 다시 걸었다. 인생의 화려함과 즐거움도 이렇게 짧았을까. 명동 한복판에 위치한 고등학교를 다녔던 그때가 불현듯 소환된다. 여고시절, 명동 바닥을 휩쓸며 몇 시간이고 걷고 또 걷고 깔깔거렸던 친구들 대신에 서로 다른 취향과 재미를 추구하는 5인 가족과 함께 하는명동나들이는 짧고 굵게 끝나고 말았다. 90년대의 명동거리와 21세기 명동거리가 바뀐 것은 단지 화려한 영상과 불빛만은 아니겠지.
즐거움을 같이 누리려면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그것을 잠시 멈춰 볼 수 있는 여유가 함께 있어야 함을 깨닫는다.
아쉬움이 가득한 채 돌아오는 길, 우리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연말 이벤트는 뭐가 있을까 생각한다. 골똘히 생각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본다. 내 곁에 있는 막내는 움직이는 귀여운 캐릭터를 잡는재밌는 휴대폰 세상에 빠져 있다. 아들도, 큰 딸도, 남편도, 나도 다들 각자의 손에 들린 모바일 세상 속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평화롭게 지루한 시간을 즐기고 있다. 취향존중하며 따로 즐기는 평화와 좌충우돌 하며 복작스럽게 함께 하는 시간 중 무엇이 더 좋을까. 우왕좌왕 괜한 고민에빠져멍하니 창문만 바라본다. '엄마!' 하고 외치는 아들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서둘러 버스를 내린다. 오늘따라 아들의 목소리가 귀에 쏙 박히는 건 기분 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