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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Jan 14. 2023

[책리뷰]나는 왜 파리채가 되려고 했었나?

(고스톱 고전 읽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2)

 하루에 세 챕터를 천천히 읽고 있는 고전 읽기가 점점 재밌어지고 있다. 나의 답답함을 정확히 읽어주는 효자손 같은 말들을 건질 때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챕터를 2~3번 읽다 보면 처음에는 암호 같았던 말들이 희미한 형체를 드러내고 뜻이 보이는 신묘한 순간을 맞이하곤 한다.


시장의 파리 떼에 대하여


 달아나라,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내가 보기에 그대는 위인들이 내는
소음에 귀먹는가 하면
소인배들의 가시에도 마구 찔리고 있다.



#세상의위인들

 세상살이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면서 좋은 답을 가진 멘토를 찾아 나선 지 오래되었다. 좋은 어른, 좋은 리더, 좋은 선생님은 어떤 모습일까. 내 주변에서 멋진 롤 모델을 찾으면 적극적으로 그들에게 질문을 하거나 조언을 듣고 따르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들이 위선을 보이거나 약해지고 거짓말을 하고 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했다. 완벽한 사람을 찾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의 그림자, 실수까지도 당당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좀처럼 찾기 쉽지 않았다. 때로는 세상의 위인들이 쓴 책을 찾아 읽고 강연을 듣거나 지금처럼 암호를 해독하듯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같은 고전을 찾아 읽으며 참된 사람의 모습을 찾으려 애쓰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가야 할 길을 아직 잘 모르겠다. 승진과 전직 같은 상승욕구에 따라 사는 것이 맞는가. 무리하지 않고 물 흐르듯 조용히 내 몫의 일만 적당히 하다 사라지는 삶이 올바른가.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좋은 것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막다른 길에 다다른 것처럼 막히는 때가 있다. 세상 소음에 귀가 먹은 듯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때가 있는 것이.


#작은사람들의가시들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먹고사는 문제에 신경 쓸 필요 없는 배부른 사람들이나 하는 일처럼 냉소적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톱니 속에서 생계를 위해 애쓰면 애쓸수록 가난해지는 구조는 그대로 두고 애초에 불공정하게 잘못 만들어진 톱니의 한 부분을 차지하겠다고 일개미 같은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고 혐오하고 갑질하며 사는 것은 괜찮은가. 삶이 왜 이렇게 팍팍한지, 우리는 왜 경쟁해야 하는지, 진짜 우리가 잘못해서 번아웃이 오는 건지 왜 그런 질문들이 냉대를 받거나 공중에 던져져 한잔 소주로 신세한탄으로만 날리고 마는지, 우리는 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물으면 "그렇게 고민해 봐야 변하는 건 없어"라며 무기력에 가시 돋친 말을 서로에게 하고 있는 걸까. 긴 피로에 휘청이는 몸짓으로 짧은 휴가도 낼 수 없어 힘낼 수 없는 서로에게 "힘내!"라며 더 일하라고 더 열정적으로 살라고 희망고문하는 습관적인 말로 우린 지금 서로를 학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두 개의 답만 존재하는 세상


시장은 성대하게 차려입은 어릿광대들로 가득하다. 군중은 덩달아서 자신의 위인들을 자랑스러워한다. 군중이 보기에 그들이 시대의 지배자인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어릿광대들을 몰아세운다. 그러면 그들은 이제 다그치며 "예" 아니면 "아니요"를 듣고자 한다.
슬프다.
그대는 찬성과 반대사이에 의자를 놓으려는가?

기꺼이 고독을 즐기던 사람은 나름의 답을 찾고 밖으로 나온다. 세상은 사고파는 거대한 시장임에  100% 동감한다. 어릿광대 같은 세상의 위대한 자들은 자기편에 서라고 이게 맞다고 서로 앞다투어 큰 소리로 외쳐대고 좌, 우 아니면 파랑, 빨강 혹은 맞고, 그름 아니면 긍정, 부정 이런 두 개의 선택지 중 하나를 택하지 않으면 나는 어느새 답답한 사람, 알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세상은 흑과 백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 텐데 팍팍한 세상이 되어갈수록 선택지는 줄어드는 것 같은 느낌은 나만 느끼는 것일까. 아무 말도 못 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을 우유부단하다, 이상하다, 튄다라고 낙인찍어도 괜찮은 걸까. 두 개의 답이 모두 마득치 않고 두 개의 선택지 말고 제3, 제4의 무한 형태의 답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걸까. 누군가가 정해놓은  선택지를 우린 그대로 생각없이 받아 들이고 있지는 않나. 먹고 사느라 바빠 정작 중요한 질문에 답을 찾는 은 뒷전으로 하고 남들이 정해놓은 선택지중 어떤 하나도 선택하지 못해 엉거주춤한 채 불안하게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이 두서없누 자들에게서 벗어나 그대의 안식처로 돌아가라. '긍정인가?' 아니면 '부정인가?'라는 물음에 시달리는 것은 오직 시장에서만 그럴 뿐이다.

달아나라. 벗이여. 그대의 고독 속으로.
그대는 독파리떼에게 마구 쏘이고 있다. 달아나라.
사나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는 곳으로



고독이 주는 안정감, 그것을 차라트스트라는 강조한다. 늘 밖으로 향했던, 늘 남에게 향했던 나의 시선을 불러들여 나를 챙기라고 돌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나는 독파리떼에게 이제 독을 그만 내뿜으라고 어르고 달랬다. 군중들에게 진정한 믿음, 진정한 답은 내 안에 있다고 다른 답들이 많으니 같이 찾자고 설득하고 이끌었다. 많은 이들이 따랐지만 결국 독파리 몇마리에 쏘이고 흔들리는 군중들의 감수성에 외면당하고 덩그러니 서있던 때가 있었다. 차라트스트라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제 됐고, 밖으로 향했던 그 모든 에너지를 거두어들여 너를 직면하는 고독의 세계로 기꺼이 들어오라'라고.


파리채가 되려고 했던 나.


독파리를 잡으려고도 했었다. 군중을 독려해 그들과 진리를 찾으려고도 했었다. 공동체 안에는 자신의 이기심으로 공동체의 선한 룰을 깨는 독파리는 어디에나 존재했었고 피하려 해도 자꾸만 모여들었다. 나는 그들을 쫓아버리려고 튼튼한 파리채를 준비하려 했고 독기를 빼서 일벌 같은 구성원이 되기를 바랐다. 나 부질없는 짓이었다.

그는 말한다.


인터넷 이미지 캡쳐


그대의 고독 속으로 달아나라!
그대는 왜소하고 가련한 자들과 너무 가까이에 살아왔다.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복수로부터 몸을 피하라! 그들은 그대에게 오로지 복수하기만을 노리고 있다.

그들을 때려잡으려고 다시 손을 들어 올리는 일은 없도록 하라!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파리채가 되는 것이 그대의 운명은 아니기 때문이다.



도우려는 자에게 실로 그들은 복수하려 했고 일으켜 세우려는 자의 손목을 당겨 진창으로 끌여들이려 했다. 많지는 않지만 어떤 공동체든 독파리는 있었고 미련하게도 나는 더욱 단단한 파리채가 되지 못한 나를 자책했었다. 나 차라트스트라는 말했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 아니라고.



섬세한 귀에만 살짝 미끄러져 들어가는 진리를 그는 거짓말이요. 무라고 부른다.
참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요란한 소음을 내며 떠드는 신들만 믿는다.

그대 진리를 사랑하는 자여,
이처럼 마구잡이로 몰아세우는 자들을 질투하지는 마라!
지금까지 진리가 마구 몰아세우는 자의 팔에 매달린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때로는 현란하게 떠드는 자들의 말들에 현옥 되어 나의 고독과 번민이 한없이 작게 보일때도 있다. 누구는 그럴듯한 책으로 자신을 내세우고 누구는 그럴듯한 말로 사람들을 흔들었다. 허나, 대중을 흔드는 이유는 곧 뭔가를 팔기 위함인 것임나약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임을 나는 알았다. 교묘하고 화려하게 대중을 흔드는 자들이 쉽게 내 생각을 가져다 쓰고 동의 없이 그것을 편집해서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서 시장의 어릿광대가 생각났다. 달콤한 그 맛에 귀를 홀리는 소리에 파리들은 꼬이겠지만 영혼의 울림과 진리의 부족함에 그들은 돌아설  것이며 혹은 독을 뿜어 어릿광대들을 쓰러눕히게 될 것임을 나는 안다. 허나 진리를 포장한 화려한 그들의 등장에 나는 질투하고 있었으며 차라트스트라는 그런 나를 알아차리고 질투하고 부러워하지 말라고 단단히 조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숲과 바위는 그대와 더불어 기품 있게 침묵할 줄 안다.
그대가 사랑하는 나무처럼 되라.
바다 위로 넓은 가지를 펼치고서  
말없이 귀 기울이고 있는 나무처럼 되라.



침묵하고 고독을 즐기며 거센 바람에 홀로 서라고 그는 말한다. 고독은 결국 나 자신과의 조우임을 안다. 독파리나 군중때문에 내가 불완전한 것도 아니그들이 나를 인정해야 완벽해지는 것도 아니기에 다만  스스로 나를 나만의 고독 속으로 초대한다.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과정만이 온전한 나로 살아가게 하는 방법임을 비로소 깨닫는다.




멈추고 읽는 <고스톱 고전 읽기>의 과정이 내 맘대로 해석이라는 부족함이 있지만 적어도  홀로 즐기는 고독의 시간을 풍성하게 채워주고 있다. 차라투스트라가 끊임없이 던지는 질문과 조언으로 조금씩 온전해지는 나를 만나는 기쁨을 만끽하고 있음을 조심스레 고백하고 싶다.



출처: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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