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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Jan 17. 2023

[책리뷰]이웃을 사랑하지 말라고요?!

(고스톱 고전 읽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

<고스톱 고전 읽기>를 같이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늘 그렇지만 누군가와 함께 하는 즐거움은 내게 참 좋은 자극제다. 헌데 이웃과 함께 하는 이런 습관적인 행동에 차라투스트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웃 사랑에 대하여


그대들은 이웃 사람 주위로 몰려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다. 그러나 내 그대들에게 말하노니, 그대들의 이웃 사랑은 그대들 자신에게 해로운 사랑일 뿐이다.
(p.103)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다. 이웃 사랑이 해롭다니. 왜 그런 걸까. 나는 늘 혼자 하는 것보다 같이 하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읽을 때도 독서토론을 하기 위해 홀로 책 읽는 시간을 기꺼이 견뎠지만, 무작정 혼자 책을 읽고 즐기는 스타일은 아니다. 가르치는 것도 우리 집 애들 한, 둘을 가르치는 것보다 학교에서 20~30명이나 되는 한 반, 동아리하나를 맡아 운영하는 것이 더 편한 점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과 책 읽기를 하기 위해 마을공동체나 독서모임을 꾸리곤 했다. 실은 이런 나를 보면서 나도 참 이상하다. 단출하게 우리 식구끼리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큰 공동체를 만들어 대의명분은 둘째치고 스스로의 피곤함을 자처하는 걸까. 혹시 내 안의 인정욕구가 너무 과한 건 아닐까.


나로부터의 도피


그대들은 자신에게 도피하여 이웃 사람들에게로 달아난다.
그리고 거기에서 하나의 덕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의 몰아( 沒我) 현상의 정체를 꿰뚫어 보고 있다.


 나는 아마도 나 자신으로부터 도망치려 했을 수도 있겠다. 불안한 나, 부족한 나, 두려운 내가 보기 싫어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참견하기 시작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종종 타인으로 받은 인정과 격려는 나의 불안함을 잠재우는 먹이가 되었을 수도 있고.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알고 보면 관심과 사랑의 욕구를 타인으로부터 받고자 애쓴 것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공동체를 위한다는 명분은 행여 부족한 내 만족감을 채우기 위한 도구는 아니었나 한참 들여다본다.


'너'라는 말은 '나'라는 말보다 더 오래되었다. '너'라는 호칭은 신성하게 불리지만 '나'라는 호칭은 아직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웃에게로 몰려가는 것이다.

이웃에게로 몰려가는 나. 왜 그랬을까. 하루 잠깐 동네엄마들과 차를 마신다. 이런저런 일상의 이야기가 오고 간다. 나는 나에 대해 이야기했을까. 다른 누군가를 쉽게 화젯거리를 삼아 이야기하며 그 시간을 때웠을까. 가만히 생각하니, 나는 타인과의 이야기를 통해 때때로 나를 비추어보거나 혹은 타인의 이야기에 지나친 공감을 하곤 했던 것 같다. 일명 오지랖퍼의 시작은 타인에 대한 과몰입, 지나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겠다. 누군가를 위한 다는 미명아래 내 정신을 온통 그쪽으로 쏟아버리면 지금 내 안의 불편함은 잊을 수 있으니까.


그대들은 자신을 칭찬하려는 목적으로 이웃이라는 증인을 끌어들인다.
그대들은 증인을 유혹하여 그대들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갖도록 만들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대들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좋은 생각을 가지게 된다.(104p.)


통렬한 비판이 내 속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다. 인정욕구에 대한 적나라한 꾸짖음에 정신이 얼얼하다. 헌데 여기서 하나 궁금한 것은 우리가 종종 뿌듯하고 보람되다고 느끼는 것과 이웃이라는 증인을 끌어들여 내가 주도면밀하게 칭찬을 하도록 만드는 것과 같은 것일까. 차이는 내가 그 관계를 내 욕심으로 이용하고 있느냐 아니면 있는 그대로 즐기고 있느냐의 차이일수도 있겠다. 아마도 그는 쎈 말을 통해 혹시나 내가 칭찬과 인정을 위해 이기적으로 이웃을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안의 욕구의 정체를 잘 살펴보라고 타이르고 있는 것일 수도.



어떤 사람은 자신을 찾으려고 이웃에게로 가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을 잃고 싶어서 이웃에게로 간다. 그대들 자신에 대한 그대들의 그릇된 사랑은 고독을 일종의 감옥으로 만들어버린다.(105p.)



나는 왜 이웃에게로 향했을까. 나를 찾으려고 그랬을까. 나를 잃으려고 그랬을까. 아니면 나 자신의 고독을 피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그런데 나는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사람들을 좋아한다. 함께 하는 그 자체로. 이유야 어쨌든 우린 참 스스로에게 낯선 존재다. '나로부터 가장 먼 사람은 바로 나였네. ' 그 사실을 인정하고야 말았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대들에게 이웃 사랑을 권하지 않는다.
다만 그대들에게 가장 멀리 있는 자들을 사랑하라고 권한다.
(106p.)


내가 가장 멀게 느꼈던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가기, 그 모든 불안에서 온 두리번거림을 거두어들이고 가만히 내 자신을 살펴보기. 내가 좋아하는 것, 혹은 두려워서 피했던 것들을 다시 살펴보기. 타인과 이웃을 위한 다는 핑계로 내팽겨두었던 내 가족, 내 자신의 불편함과 마주하기, 그리고 그 부족함도 어색함도 끌어안아 사랑할  용기를 찾으라고  차라트스트라는 말한 것이 아닐까 어설픈 짐작을 하며 장을 덮는다.




출처: <차라트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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