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곳 협재에 오기로 한 것은 그 여름 그 바다가 생각나서였다. 재작년 7월 에메랄드빛으로 빛나던 바다에 잠깐 머물다 간적이 있었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의 이국적인 빛깔에 매료되어 언젠가는 꼭 한번 더 와야지 다짐했었다. 그리고 그 바다에 이렇게 다시 와 있다. 그런데 내가 봤던 그 바다는 없다. 대신에 성난 파도와 매서운 바람, 덮칠 것같이 달려드는 물결에 옷을 부여잡고 잔뜩 웅크린 채 얼른 피할 곳을 찾아 도망가고 싶은겨울바다가 펼쳐져있다. 같은 곳, 같은 바다인데 여름엔 순한 맛, 겨울에는 땡초붉닭맛 정도되겠다. 어제 택시기사님이 말씀하시길, 북서풍 바람이 불면 바다의 모습이 바뀐다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세상 온화한 에메랄드빛 바다로 돌아온다고 하신다.
아, 그렇구나. 새롭게 또 하나 배운다. 사람도 그렇겠지. 어느 때, 어떤 바람과 해와 파도를 만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냉탕과 온탕을 드나들듯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이곤한다.
2월의 성난 협재바다
엄마, 언제까지 걸어요?
체력도 근력도 약한 엄마야 천천히 느리게 걸으며 감성도 찾고 글감도 찾아 좋겠지만 애들은 이것도 저것도 모르겠고 걷는 게 춥고 귀찮을 뿐이다. 허기야 독특한 엄마취향 맞춰야 하는 우리 집 아이들도 나름의 고충이 있겠다 생각한다. 이 겨울에 바다에 우리나라 끄트머리 섬에 와서 코끝이 찡해지도록 추운 바닷바람을 마주하며 걷는 아침산책 길이 좋을 리가 없다. 몇 년 전 그때만 해도 나도 젊고 덜 아플 때라 겨울에도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서 잘 걸어 다니곤 했으나 이젠 나도 아이들도 많이 달라졌다.
엄마만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초등학생아이들은 사라지고 중2.3되는 어른만 한 아이들이 된 것이다. 운동이 부족한 아이들운동이라도 시켜 볼 얕은 수로 해변서 20분 정도 떨어진 숙소를 싼 가격에 덜컥 잡아버렸다. 그렇지만 호락호락하게 엄마의 뜻대로 움직일 애들이 아니다. 맛난 디저트를 사준 다하면 군말 없이 따라나설까 했지만 50%만 성공!딸들만 따라나선다. 이게 뭔 다이어트가 될 까싶지만그래도방에서 영상만 보는 것보단 낫다. 큰 애들은 뚜벅이 여행자인 엄마의 걷는 여행에 10년 이상되는 단골고객님들이라 이런 여행스타일에 익숙해져서그런지 한번 나오기가 어려워 그렇지 막상 나서면그러려니 하고 잘 걷는 편이다. 이번에는 신입회원 막내가 문제다. 막내는엄마껌딱지라 따라나서면서도 걸어가는 내내 "다리 아프다. 춥다. 돌아가자." 삼단 콤보멘트로 징징거린다. 비만관리 중인 큰 애들을 위한 산책코스인데 살 뺄 필요가 전혀 없는 애꿎은 막내만 매일 고생이긴 한데 오늘은 애원하듯 한마디 한다.
엄마, 이제 그만 걸어요~제발!
이렇게 궂은 날씨에바닷가 산책은 아이들의 화를 불러일으키곤 한다. 늘 그렇듯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달달한 것이 필요하다는 신호. "푸딩맛집에 가자~~ 이번에는 특별히 버스를 타게 해 줄게!"
선심 쓰듯 큰소리친다.
수줍은 듯 열린 출입문
협재 푸딩 맛집 <우무>
한눈에 쏙 들어오는 아주 심플한 인테리어에, 한 팀씩만 모시는 특별서비스에, 고급스러운 포장에 비싼 가격(6,800원)에 ~ 각자 딱 한 개씩만 선택해 사서 나온다. 푸딩처럼 몽골몽골 해진 기분으로 버스를 타고 내려서 또 20분을 걸어 올라온다. 아주 수고스러운 구매여행 끝에 방에 와서 뚜껑을 열어 한입 먹어 보니 과연 그 맛이 끝내준다. 달지도 진하지도 않고 딱 좋게 부드럽고 담백하다.
이냉치냉: 추울 때는 더 추운 체험으로
아들이 유일하게 픽한 제주체험은 "배낚시". 그런데 예약시간이 되어갈수록 바람이 더욱 세차 진다. 날도 아주 잘 잡았다. 그래도 선장님을 믿고 배에 오른다. 막내랑 한 팀으로 어설픈 강태공이 되어본다. 크릴새우를 미끼로 써서 처음으로 낚싯대를 내리니 "오~ 걸렸다." 자잘한 물고기가 몇 마리 걸려 나온다. 미끼를 못 꽂는다고 구시렁하더니 평생 원수처럼 티격태격하던 1.2호가 세상 친하게 서로 도우며 낚시를 하고 있다. 역시를 새로운 뭔가를 같이 해야 평화롭다. 바람은 차도 물고기를 잡는 즐거움에 추위도 잊고 시간이 금방 간다.
첫 물고기 두둥 등장
세상 친해보이는 남매의 뒷태
그런데 보기 좋은 평화도 잠시. 갑자기 등뒤가 시끄럽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니 큰 딸이 뭔가를 잡았는지 낚싯대를 돌려 올리며 우아~하며 소리친다. 작은 쏨뱅이(제주 우럭) 하나가 걸려 올라온다. 딸이 놀라서 휙 낚싯대를 돌리는데 하필 고기가 2호 아들의 종아리에 딱 떨어지고 만다. 갑자기 놀라서 화가 난 아들이 "그걸 왜 여기에 던지냐고~" 누나한테 소리를 지르며 황급히 다리를 턴다. 작은 고기가 바닥에 딱 떨어진다. 아들은 많이 놀래서 그런지 어찌나 화를 내는지 어떤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누나가 놀라서 그랬는데 무슨 화를 그렇게 내냐고 달래 봐도 막무가내다. 늘 그렇듯 조용히 끝나는 엔딩이 없다. 씩씩거리는 동생한테 마음 약한 누나가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얘기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화를 푼다. 참, 보면 볼수록 변화무쌍한 10대들이다.
멀미유발자, 감정의 파도타기
오늘은 낚시만 하고 방에서 쉬고 싶다던 큰 애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1.2호는 택시를 태워 숙소로 보내고 수영을 하고 싶다던 막내와 나는 온천으로 간다. 이토록 민주적이고 취향존중하는 여행이 어디 있냐며 생색을 내고 큰애들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에게 전화가 온다. "아니, 키를 안 주면 어떻게 하냐고요?"다짜고짜 샤우팅이다. 늦게 나온 큰 딸에게 키를 챙겨 오라고말해두었는데.아들말로는 큰딸이 막내가 키를 갖고 싶다고 졸라서 줬다는데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나 보다.데스크에 말해서 키를 받았다 말하면서도 분이 가시지 않았는지 어쩔 줄 모른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 키는 있으니 다행이니화는그만 내고 이따가서 말하자 하고 전화를 끊는다. 갑자기나도화가 나고 속이 울렁거린다.
분노 대신에 실수를 인정하기
온천욕을 마치고 숙소에 왔다. 오자마자 큰딸은 너 때문에 고생했다며 막내를 타박하고 놀린다. 했던 말을 하고 또 하고. 일단 그만하라고 말하고 간단히 저녁을 먹고 쉰 다음 아이들을 불러 모은다.
오늘 일에서 각자의 실수는 없었는지 얘기해보자고 한다. 아들이 먼저 말한다.
아들: 엄마한테 화내고 짜증 낸 거요.
엄마 : 응. 맞아. 오늘 엄마는 네 감정의 쓰레기통 같았어. 잘 생각해 봐. 그렇게 화낼 일은 아니잖아. 그렇지?
아들 : 눼~죄송합니다.
2호는 이렇게 제일 많이 툴툴대도 제일 빨리 화가 풀리고 사과하는 편이다. 이불을 뒤집어쓴 큰 딸에게도 묻는다.
엄마 : 오늘 큰딸은 어떤 실수를 했어?
큰딸 : 막내한테 키 준 거. 숙소오기 전에 키 안 뺐은 거.
엄마 : 키를 뺐는 게 아니라 달라고 해야 하고 키를 왜 주면 안 되는지 말하고 설명해서 주지 말았어야 했어. 그렇지? 자, 이제 막내.
막내 : 언니한테 키 달라고 조르고 까먹고 다시 안 돌려준 거.
엄마 : 응. 맞아. 그건 네가 잘못한 거야. 언니한테 사과하자.
막내 : 언니, 미안해~
큰딸 : 응.
엄마 : 엄마도 너희들한테 키 있냐고 다시 묻지 않은 게 잘못이었어. 이렇게 서로 실수가 있었어. 그런데 이런 때는 누구한테 화를 낼게 아니라 상황을 보고 얼른 문제를 해결하는 게 먼저야. 1.2호는 키가 없어진 걸 알고 데스크에 가서 말하고 보조키를 받은 건 너무 잘한 거야. 그 점은 아주 훌륭했어. 여행은 이렇게 돌발상황을 대처하고 해결하면서 재미를 찾는 거야.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거든. 근데 이런 돌발상황을 그럴 수 있다고 인정하지 못하고 화를 내고 남 탓만 한다면 여행을 망치게 되는 거야. 알겠지? 그럼. 내일 뭘 할지 얘기해 보자.
성난 파도를 서핑하고 나면
아이들의 생각이 커지는 사춘기에는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이 강하고 상대의 잘못에는 쉬이 비난하거나 반항하는 성향이 강하다. 자신의 불안정한 상태를 보는 상대의 불편함은 고려치 않고 "나도 나를 모르겠단 말이야. 어쩌라고~"의 메시지를 온몸으로 내뿜는 것 같은 기운을 느낀다. 이런 상태를 감지하면 일단 피하는 게 상책이다. 화를 낸다고 그 화를 화로 대하면 더 큰 화가 되어 대형화재가 되곤 한다. 잠시 쉬고 먹이고 마음이 부들부들해지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넌지시 던진다. 왜 그랬냐고 그때 네 마음은 어떤거 였냐고. 그러면 흐물흐물해진 마음이 독기를 빼고 있는 그대로의 감정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감정의 파도타기를 하는 아이들도 보는 부모도 가끔 멀미가 온다. 그런데 이런 때는 불편한 감정을 토하고 게워내는 수밖에. 힘들고 냄새나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집에 있으면 울렁거리는 감정의 멀미를 감당하기 힘들어 도망 다녔던 것 같다. 나도 내 감정의 멀미가 요동쳐 감당하기 힘들고 일상의 잡다한 것들에 밀려 아이들 감정을 직면할 용기도 체력도 부족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여행하며 붙어있으니 감정의 파도타기를 직관하고 멀미를 느끼고 게워내는 전 과정에 어쩔 수 없이 모두가 함께 할 수 밖에 없다. 힘들긴 하지만 막상 감정을 다 토하고 나면 편해지는 느낌, 아이들이 한층 성장하고 있는 느낌이 훅 든다.
이 겨울 성난 파도는 지난여름 잔잔한 물결과 같은 존재였음을 기억한다. 아이들의 성난 감정도 때가 되면 잔잔해지기를 기다린다. 감정의 파도타기를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대지만 잔잔해진 물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그땐 슬그머니 말을 걸어봐야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춘기 감정의 파도타기에 나도 모르게 휩쓸려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점점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요동치는 감정의 파도타기를 하고 어설픈 서핑까지 해보려다 멀미가 나고 머리가 띵하지만 아이들 인생에 필요한 그 무엇을 하나씩 하나씩 몸으로 배우고 넘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렇게 제주여행 3일차 일정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