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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Feb 02. 2023

[협재]하나만 투어: 제주도도 식후경

(삼인삼색 삼남매와 함께하는) 삼삼한 제주여행기 1탄


제주에 왔다.


삼 남매랑 나, 넷만. 사람들이 괜찮겠냐고 묻고 또 묻고 나는 욕심내지 않고 바람만 쐬다 올 거라 했다. 그런데 웬걸~ 출발 날짜가 다가올수록 힘이 빠지고 짜증은 늘어갔다. 부담 전조증상이 나를 엄습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도 제주 바다가 심약한 내게 신선한 콧바람 주입하여 생기를 심폐소생해 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방학 동안 애들이랑 집에만 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란 걸 알기에 정신을 차리고 출발 하루 전 후다닥 짐을  휘리릭 날아왔다.

 

회사일이 바쁜 남편도 못오고 그 흔한 렌트카없이 오는 여행이 처음은 아니다. 다만, 쇠약해진 내 건강이 걱정될 뿐. 고단한 몸은 가정용의료기기와 전기매트로 달래며 어찌저찌 버티겠지만 괜한 노파심에 애들 아빠도 나도 이 여행의 의미와 수칙에 관해 삼 남매들에게 비장하게 교육했다

 "엄마는 이제 너희들 도움 없이는 여행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엄마의 보호자는 너희다." 라며 부담스러운 멘트를 날려가며 유효기간이 며칠이나 될지 모르는 어설픈 정신교육을 하고 또 다.  "여행취소" 언제나 그렇듯 웬만해서는 선택지에 없다. 엄마의 돌봄이 빠진 자리에 아이들의 책임감과 자율성이 한 뼘 더 자라날 절호의 찬스임을 알기때문에.


미성년자 3명과 환자 1명, 약자투어는 무리하지 않는 일정으로 시작한다. 첫날은 비행기를 타고 내리고 숙소에 도착하는 심플한 일정으로 끝. 다음날부터 여행을 시작한다. 취향존중짐 싸기를 한탓에 짐도 바리바리, 막내를 뺀 세명의 덩치도 만만치 않아 김포공항행 택시에서는 콩나물시루처럼 꽉 끼어 앉아 안정적인 호흡에 심각 위협을 느끼고 제주공항에서 숙소까지는 고민 없이 대형택시를 잡아탄다. 진짜 쾌적하다. 돈이 좋긴 좋다는 걸 새삼 느끼고. 이제서야 붉게 물드는 노을도 보고 저 멀리 넘실거리는 바다도 여유롭게 바라볼 수 있다. 제주가 처음이 아니건만 올 때마다  새롭. 



둘째 날, 아침이다.


뚜벅이여행자의 유일한 특권이자 재미는 동네산책이고 그중에서도 백미는 골목투어다. 숙소에서 해변까지 가는 길목의 풍경을 느릿느릿 걸으며 천천히 감상하는 여유로움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푸근한 돌하르방이 생각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으로 야트막하게 쌓아 올린 정겨운 돌담이며 양배추나 당근 같은 싱그러운 먹거리가 사이좋게 옹기종기 자라나는 현장을 볼 수 있어 좋다. 초3막내에겐 자연관찰시간이고 생활중심형 사회체험시간. 드문드문 집들이 양옆으로 지어진 조용한 골목길에 들어서여기저기서 짖어대는 동네개의 격한 환영인사를 받을 수 있다. 전방 200미터 전부터 짖어대는 까칠한 아이도 있고, 저 멀리 우리의 실루엣이 보일 때부터 담벼락에 올라와 격하게 꼬리를 흔들며 맞이하 다정한 아이도 있다. 소소하게 동네의 주인공들을 만나고 아롱이다롱이 다양한 집들도 구경하며 걷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이 맛에 힘들고 번거로워도 뚜벅이여행을 그만둘 수가 없다. (절대 운전을 못하거나 무서워서 그런 건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다른 것이 보인다.


 제주에 올 때마다 새로운 이유는 내 시선이 머무는 곳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지평선과 수평선, 하늘과 바다가 만나고 땅이 만나는 너른 해방감에 시선이 멈추고 하늘에 펼쳐진 구름의 모양이 다르고 하늘과 땅을 연결하듯 쭉뻗은 나무의 고고함마음을 뺏겨 카메라를 꺼내 들곤 한다.

노아의 방주를 표현한 방주교회와 하늘, 그리고 물


셋다 만족하는 것이 있을까.


연령도 취향도 성별도 나이도 다른 네 명, 이들기호에 맞춰 여행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미션이다. 아이들에게 여행코스를 제안하고 원하는 행선지와 맛집을 추천해 주면 기꺼이 반영해 주겠다고는 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의견교환이 쉽지 않다. 엄마가 제안한 코스는 별로지만 스스로 여행지를 검색하고 찾아 제안하긴 귀찮기만 한 큰 애들은 대충 "알겠어요. 엄마가 맘대로 하세요." 말해버리고. 나중에 딴소리하기 쉬운 변덕쟁이인걸 알기에 "그럼 나중에 궁시렁하고 불평하면 안 된다." 단단히 다짐을 받아둔다. 별의미 없는 짓인걸 뻔히 알면서도.(그냥  심신의 안정을 위한 다짐일 뿐~)


오늘 일정은 "오설록~ 방주교회~ 카멜리아힐~ 감귤 따기 체험~ 헬로키티아일랜드" 장거리 투어라 큰 택시 대절기사를 과감히 모시고 현지가이드설명 서비스를 더해 알찬 하루를 보냈다. 문제는 둘째 아들, 이미 공지했음에도 이제야 현타가 왔는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코스가 없다며 내 귀에 작고 조용한 목소리로 구시렁 멜로디를 끊임없이 흘려보냈다. 동행하는 기사님이 계시니 큰 소리는 못 내고 복화술과 강렬한 눈빛으로 제압하려 했으나 씨알도 안 먹히고 아주 짜증이 제대로다.

 

멋진 제주하늘과 대비되는 분노의 옆라인


이런 동생의 불편한 심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딸내미 둘은 비누 만들기 체험에 화장품 시향까지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정적으로 즐기고 있다.

나 또한 신나서 같이 한건 안 비밀~  아들라인과 딸라인을 왔다 갔다 하며 분위기를 살피느라 힘들었지만 녹차와 화장품, 멋진 풍경을 놓칠 수는 없었다.



방주교회를 끝으로 아들의 인내심이 바닥난 걸 눈치챘다. 점심식사로 협상에 들어간다. 2호가 원하는 근처 맛집을 말하면 사주겠노라고 했지만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고 까칠하게 대답하고 검색해보라고 대응해봤지만 결국 협상결렬. 이럴 때는 중재인이 필요하다. 택시기사님께 맛집을 추천해달고 하니 맛난 메밀국숫집을 단박에 알려주신다. 인기가 많아 대기가 길거라 말해주셨지만 1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할 줄이야. 그래도 기사님이 어찌나 맛깔나게 맛집을 설명해 주셨던지 삼 남매 모두 그 시간을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폰도 보면서 아무 소리 없이 묵묵히 참아냈다. 드디어 영접한 이름도 거룩한 "비비작작면"의 자태. 하나하나 정성스러운 고명들이 푸짐하게 보기 좋게 플레이팅 되어 나온다. 비비작작이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낙서하듯 그리는 모양을 뜻하는 제주방언이라고 한다. 그 말대로 어린아이의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들기름향에 갖은 채소들이 각각의 식감을 뽐내며 과하지 않게 어우러져 담백하고 묘한 매력을 뿜는 새로운 맛을 보였다. 삼 남매 모두 오랜만에 엄지 척하며 대동단결하여 맛있다고 칭찬하며 각자의 그릇을 싹싹 비워냈다.

제주메밀비비작작면의 자태


 배를 든든히 채워주니 그 다음일정은 아주 순조로웠다. 게다가 키티아일랜드는 딸 두 명만 보내고 아들과 내가 조금 쉬니 더욱 여유롭게 남은 일정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따로 또 같이 즐기려면


제주는 다 좋은데 딱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물가다. 뭍에서 멀다 보니 먹거리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다. 한창 잘 먹는 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다 보면 "돈을 물 쓰듯 한다"라는 말을 실감할 정도로 후덜덜한 비용이 든다. 그래서 마지막 일정은 식당대신 마트로 향한다. 큰 딸은 딱새우, 아들은 치킨, 막내딸은 떡갈비. 나는 광어회. 아이들이 좋아하는 메뉴 하나씩을 골라한 상에 차려놓으니 비용은 줄고 상은 더 근사해지고 아이들의 기분도 슬슬 좋아진다.

 


이때가 기회다. 오늘 차마 못한 말을 슬그머니 꺼낸다.


애들아. 너희들은 셋이고 개성도 입맛도 다 달라.
누군가 한 명이 좋은 걸 하면 한 명은 기다려야 해. 나중에 또 자기가 좋아하는 걸 할 때 다른 사람이 또 기다려주고.
그건 화낼 일이 아니라 당연한 거야.

셋다 좋아하는 게 있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늘 그렇지는 못하니까
서로 순서를 정해 원하는 걸 하고 자기 순서가 아닐 때는 기다리고 참아야 모두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는 거야.
알겠지?


닭다리를 뜯으며 "예"라고 대답하는 아들의 목소리가 경쾌하다. 어제 족발을 뜯으며 한없이 너그러웠던 것처럼 먹는 거 하나에 이렇게 순한 양이 되다니. 아이는 아이다. 어제는 고기뜯는 모습이 그리도 얄미워 보이더니 오늘은 귀엽다. 엄마의 마음도 제주바람과 함께 슬그머니 따스해 졌나보다. 엄마는 여행이 필요했고 아들은 치킨이 필요했다. 각자의 욕구를 인정하고 그것에 반응하니 비로소 서로의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거겠지. , 역시 제주에 오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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