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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Nov 11. 2022

[함덕]하나+1 투어

디스크 환자의 살금살금 제주여행기 (2편)

 원래도 운전을 못해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보지 못했지만 이렇게 허리가 안 좋아지고 보자연스럽게 더욱 작고 소박한 미니멀리즘 여행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 곳을 진득이 보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깊은 맛 재미를 선사한다.


조식으로 든든하게 시작하는 아침

아침 7시, 기분 좋게 일어나 씻고 나갈 채비를 한다. 다행히 둘 다 아침형 인간인지라 아침시간에 눈치 보지 않고 준비를 할 수 있어 좋다. 강한 생존 정신에 아침식사가 되는 식당은 몇 군데 알아놓은 터라 과감하게 호텔 문을 박차고 나간다. (실제로 문을 세게 안 닫으면 덜 닫혔다고 삐삐~소리가 나서 쾅! 하고 닫아야 한다. ㅋ)

푸짐한 털보식당 조식메뉴


뜨끈한 성게 미역국과 달달하고 짭조름한 흑돼지 불고기를 시키고 든든하게 아침을 먹는다. 신기하게도 주황색 귤 무침이 반찬으로 나왔다. 냉큼 베어 무니 귤 맛이다. ㅋ

식사를 마치고 나와 어제와는 다른 반대편, 동쪽 방향으로 걷는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바닷빛이 초록과 파랑 그 언저리에서 다채롭게 바뀌었다 흐려졌다 변하면서 묘한 신비감을 자아낸다. 길은 단조롭지만 풍경이 계속 바뀐다. 보는 각도와 자세를 바꾸면 새로운 색과 장면이 펼쳐지기에 느릿느릿 걸어도 지루할 틈이 없다.


바다를 빽으로 모닝 뷰 맛집, 빽다방 모닝커피

한참 걷다 보니 멋진 뷰를 내려다보는 카페가 보인다. 도시에서는 작은 공간에 테이크아웃을 주로 하는 빽다방이 여기서는 5층 건물 전체를 차지하고 우뚝 서있다. 따뜻한 라테 한잔을 주문하고 한적한 5층 루프탑에 앉는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선선한 바람이 알맞게 불어온다. 참 좋은 아침이다.

백다방 루프탑

한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사느라 빡빡했던 걱정도 근심도 저 멀리 흐릿한 점처럼 떨어져 보인다. 주고받는 대화가 따뜻한 공기가 되어 채워지나근나근한 음악이 되어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무심코 던진 시선은 저 멀리 푸른 바다에 닿아 딱딱했던 마음이 말랑말랑 부드러워진다. 한동안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고 소곤소곤 이야기 꽃을 피워낸다.


빼곡하고 편안한 삼나무 숲길로의 여행

따뜻한 모닝커피로 힘을 얻어 잠깐 함덕을 벗어나기로 한다. 함덕에서 30분 정도 차를 타고 찾아간 곳은 한라산 둘레길에 자리 잡은 야트막한 숲길, 이름하여 "사려니 숲길".


‘사려니’는 ‘신성한 숲’ 혹은
‘실 따위를 흩어지지 않게 동그랗게 포개어 감다’라는 뜻이다.

빽빽한  삼나무 숲

이름처럼 빼곡하게 삼나무가 포개어 감은 이곳은 빽빽한 삼나무뿐만 아니라 졸참나무, 서어나무, 때죽나무, 편백나무 등 다양한 수종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나무데크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깊은 숲 속에 초대된 것 같다. 어느새 원시림의 깊은 청량감이 몸 안에 스며들어 내 안의 구석구석이 정화되는 신성한 기분에 푹 빠진다.

사려니 무장애 나눔길

특히나 우리가 간 곳은 "무장애 나눔길"이라고 교통약자층을 배려한 시설로 산림복지 불평등을 해소하여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누리는 행복을 담은 숲길이라고 한다. 경사도 없고 장애물도 없어 누구나 편하게 숲길을 체험하고 평등하게 좋은 공기를 맘껏 들이마실 수 있다. 숲길하나에도 약자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보여 길이 더욱 푸근하게 느껴진.

죄책감이라는 짐 스스로 내려놓기

아프다고 침대에만 누워있긴 힘들었다. 디스크 통증은 괜찮다 싶으면 나타나고 잠잠해진 것 같다가도 어느새 내 곁에 와 있다. 움직이고 걷다가 쉬다가 둘러보다가 앉았다가 눕기도 하는 요양을 포함한 여행이 있었으면 했다. 혹시 아파도 쉬지 못하고 힘들어도 짬을 못 내서 쉬지도 못하는 누군가에겐 미안했다. 하지만 이기적 이게도 나는 또 내 삶을 지금 이 시기에 맞게 풍요롭게 지켜내고 싶었다. 제주로의 잠깐 여행에 왠지 모를 죄책감이라는 짐을 떨쳐버리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 날 갑자기 현재의 나에게 충실하기로 단호하게 마음을 먹었으며 내 몸과 내 마음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하는 긴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 길을 나섰다.  


울창은 숲은 그대로였고 푸른 바다도 변함없었다. 수시로 출렁이는 건 내 마음뿐이었고, 정처 없이 흔들리는 건 내 의지뿐이었다. 한곳에 집중하니 더 많은 것이 보였고 한 군데만 바라보니 번잡한 마음도 가지런해졌다. 고작 2박 3일의 중간 여정을 지났을 뿐이데도 생각보다 많이 충만하고 생각보다 많이 즐겁다. 내 몸에 반응하고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살금살금 환자 여행 괜찮은데~혼잣말하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힘을 실어 내딛는다. 다음은 어떤 여정이 기다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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