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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Feb 12. 2023

[북리뷰] 나는 왜 (고전을) 읽는가?

(고스톱 고전 읽기) 월든 3


 <월든>의 '3장 독서'를 읽었다. 가장 공감 가는 파트였다.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나는 왜 읽기 시작했을까?'였다. 독서라는 것을 통해서 나는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어떤 사람이 되어가고 있으며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걸까. 부끄럽지만 내가 독서를 하는 아주 사적인 이유를 찬찬히 적어본다.


생각 없이 하는 행동에  '멈춤!' 할 수 있다.


그냥 생각 없이 살면 세상이 시키는 데로 살게 된다. 어느날, 여가시간에 내가 편하게 하는 행동이 무엇일까하고 살펴보니 하나는 핸드폰 보기, 또 하나는 그냥 수다였다. 핸드폰을 하다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는 광고에 클릭을 하고 쇼핑을 하거나 카톡이 오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행동을 하는 건 나인데 내 행동의 주체가 내가 아니었다. 이런 잘못된 행동을 감지해 낼 수 있었던 건 독서의 힘이 가장 컸다. 그때부터였나. 나는 의식적으로 잘못된 행동을 차단하고자 독서모임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 독서회 정기모임시간 전에 책을 읽기 위해 폰 하는 시간, 쇼핑하는 시간, 사사로운 수다시간을 줄여나갈 수 있었다.



독서를 잘하는 것, 즉 참다운 책을 참다운 정신으로 읽는 것은 고귀한 '운동'이며, 오늘날의 풍조가 존중하는 어떤 운동보다도 독자에게 힘이 드는 운동이다. 그것은 운동선수들이 받는 것과 같은 훈련과, 거의 평생에 걸친 꾸준한 자세로 독서를 하려는 마음가짐을 요한다. 책은 처음 쓰였을 때처럼 의도적으로 그리고 신중히 읽혀야 한다.
(155p.)



대화의 소재가 훨씬 다양하고 심도 깊어진다.


수다 떠는 건 재밌다. 스트레스도 해소된다. 그런데 그 방향이 때로는 소모적이거나 누군가를 비방하고 욕하는 쪽으로 흐르는 건 별로다. 그런데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의 성향을 존중하면서 발전적으로 소재를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독서였다. 솔직히 책 그 자체를 좋아해서라기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 나는 책 읽기를 선택했다. 책을 읽고 사람들과 얘기하다보면 얘기할 거리가 무궁무진하다. 적어도 남편, 시댁, 아이들 이야기에   제한되는 수다의 함정에서는 벗어날 수 있다. 가장 큰 방향의 전환은 남이 아니라 나를 보게 되는 변화이다. 이것이 그 어떤 이유보다도 가장 본질적이며 고귀한 책읽기의 핵심이다.


책 읽기 자체가 재밌어진다.

 

 책이 좋아서 읽기 시작한 건 아니었다. 나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줄이기 위해 또는 아이들에게 독서교육을 시키기 위해 책을 의식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책 읽기가 재밌어졌다. 책 속에 내가 고민했던 문제의 답이 있었고 상처받았던 관계의 치유법도 있었고 나랑 똑같이 느끼고 생각한 사람의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모여 독서에 더욱 빠지게 했다. 특히나 세상을 읽는 지혜나 안목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음을 종종 느낄 때는 아주 뿌듯하다.


하필 고전을 읽는 이유는?


 처음에는 아이들을 위해 고전을 읽기 시작했는데 이젠 나 자신이 고전 읽기에 푹 빠졌다. 소위말해 통속소설은 너무 재밌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인데 그걸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책 읽기도 휴대폰이나 영상 보는 것보다 낫다고 할 수도 있지만 깊은 여운이 남지는 않는다. 


자장가를 듣듯이 심심풀이로 하는 독서는 우리의 지적 기능들을 잠재우는 독서이며 따라서 참다운 독서라고 할 수 없다. 발돋움하고 서듯이 하는 독서,
우리가 가장 또렷또렷하게 깨어있는 시간들을 바치는 독서만이
참다운 독서인 것이다.(159p.)



그런데 고전은 읽기는 그렇지 않다. 어떤 때는 한 장 넘기기가 힘들 정도로 어려울 때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읽기 위해, 이해하기 위해 애쓴 시간만큼 여운은 길게 남는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자유로운 조르바의 삶의 태도를 배운 달지 <데미안>을 읽고 알을 깨듯 힘겨운 인간성장의 고통을 느낀 달지. 남들에게 설명하기 힘든 고민과 삶의 수수께끼를 같이 풀어내고 있는 듯한 연대의식을 먼 시대의 작가와 공유할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 읽는 과정의 고생스러움이 일반적인 책에서는 얻을 수 없는 이해의 폭과 공감의 깊이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힘든 만큼 보람된 읽기가 된다.



우리를 당혹하게 하고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며 우리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문제와 똑같은 문제들이 일찍이 모든 현명한 사람들에게도 제기되었다. 한 문제도 빠짐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들 현인들은 저마다 이 질문들에 대해 해답을 제시했다. 자기 능력에 따라, 또 자기 고유의 언어와 생활 방식으로. 그뿐 아니라 우리가 지혜를 배우면 그와 동시에 너그러움도 아울러 배우게 될 것이다. (165p.)




1 마을, 1 오은영박사님을 갖는 비결은?


 요즘 TV를 틀면 전 국민이 단체로 육아와 결혼, 삶에 대한 고민을 오은영박사님께 컨설팅 의뢰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곤 한다. 왜 우린 우리 문제를 전문가에게 맡기고 외주화 하기 시작했을까. 왜 어떤 한 사람의 의견에 이렇게 범국민적으로 획일적으로 열광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진다. 아파트생활로 이웃을 만날 기회가 줄어들고 코로나로 더욱 서로 소통하기 힘들어진 상황 때문일까. 아이들의 작은 문제도 부부간의 소원해진 관계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풀어낼 수 없는 무기력한 어른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만약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여유와 열린 마음, 일상적인 토론문화가 형성된다면 어떤 한 사람에게 매달려 답을 듣기 위해 기다리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다양한 답을 찾고 금방해결할 수 있지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몇 해전에는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는 설민석선생님에 의해서만 설명되어야만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동네사람들과 역사책과 고전을 읽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우리 마을이 작은 대학이 된다면 1 마을, 1 오은영 박사님, 설민석 선생님이 탄생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영상 속에서 답을 찾을 필요 없이 내 손 안의 고전 속에서 해안을 얻고 옆집 엄마들과 대화를 통해 손쉽게 답을 찾게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우리 마을에 성인들을 위한 학교를 세워서, 청소년들이 어른이 되려는 시점에서 교육을 중단하는 일이 없도록 할 때가 왔다. 마을 하나가 대학이 되며, 나이 많은 주민들은 그 대학의 특별 연구원이 되어 남은 평생 여유를 가지고서 교양으로서의 학문을 추구할 때가 온 것이다. 세계가 언제까지 파리 대학 하나, 옥스퍼드 대학 하나로 한정되어야 한단 말인가? (166p.)



 먼 곳의 위대한 사람보다 내 곁은 작은 영웅들이 나는 더 중요하다고 말했었다. 내 곁은 좋은 어른들이 많아지는 것이 더 좋은 마을이 되는 비결임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나 스스로가 귀감이 되는 어른이 되는 방법은 생각보다 쉽다. 책을 읽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어른이 되면 그런 어른들이 하나둘 많아지면 더 좋은 마을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평생교육, 전인교육으로 가는 작은 시작점이 될 수도 있겠다.



귀족들 대신에 보통 사람들로 구성된 고귀한 마을을 건설하자. 필요하다면 강에 다리 하나를 덜 놓고 그래서 조금 돌아서 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비용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다 어두운 무지의 심연 위에 구름다리 하나라도 놓도록 하자.
(168~169p.)


 

 아파트 옆 빌라가 많은 동네로 가는 통로를 만들자는 의견에 반대하고 담을 쌓는 어른들 대신에 화단을 만들어 길을 공유하는 일에 동의하는 어른이 많아진다면, 엘리베이터 하나 덜 놓는 대신 도서관 하나를 더 짓는 것에 동의하는 어른이 많아진다면 세상은 조금 더 평등해지고 조금 더 밝아지고 더 많이 웃게 될 것이다. 소로우의 말처럼 독서는 인간들에게 지혜뿐 아니라 너그러움도 선사하기 때문이다.


*출처: <월든> 헨리 데이비드소로우,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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