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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Dec 31. 2023

부모 그림자 해방일지

<북리뷰> & 라라크루 : 금요문장공부


이번주 라라크루의 금요문장공부 미션을 받았다.  문득, 두 권의 책이 기억난다. 한 권은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 다른 한 권은 카뮈의 <이방인>. <달밤의 인문학 산책> 독서모임에서 이 두 권의 책을 나란히 읽자고 제안했었다. 까닭은 두 권다 부모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다를까, 또 무엇이 비슷할까. 비교하며 읽으면 뭔가 흥미로운 포인트가 있을 것 같은 어렴풋한 예감이 있었.


Part 1. <아버지의 해방일지>


잘 읽히지가 않았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아마도 주인공 아리와 같은 마음처럼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궁금하지도 않은) 지지고 볶는 시시콜콜한 가정사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을까. 처음에는 잘 읽히지 않았다.  아버지가 전봇대에 부딪혀 돌아가시는 웃지못 할 사고에 꼬이고 꼬인 관계의 복잡함, 빨갛고 파란 정치색이 섞여 심란함을 더 가중시켰을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불편했던 건

내 아버지의 모습도 빨치산 아버지의 모습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는 것이다. 늘 남에게 잘했던 아버지, 특히나 고향사람, 친지형제들에겐 설설 기던 분이 가족에게는 늘 대면대면했다. 그 시절 아빠들이 그렇듯 애정표현도 챙김도 그저 그랬다. 없는 살림에 투머치 오지랖으로 주변사람들은 끔찍이 챙기는 이중성에 주인공 아리만큼 나도 아빠에게 넌더리를 낸 적이 많았다. 그 와중에 아빠의 불우한 개인사를 생각하면 또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동시에 들어 왜 그러냐고 따져 묻기도 애매했다. 주인공 아리가 나의 아바타인 듯 과도하게 공감되어 아리의 감정을 따라 오락가락 멀미하듯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넘의 사정은 그리 빤함 시로 마누라 사정은 워째 깜깜 봉사까이. 팔다리가 쑤세서 밥도 겨우 해묵고 끙끙 앓니라 잠도 못 자는디, 그 돈 있으면 나 벵원이나 보내주제. (60p.)



사투리만 달랐지 우리 엄마가 아빠에게 넋두리처럼 하는 말씀과 다를 바가 없다. 주인공 아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정치이야기를 많이 하고 민중을 사랑하는 "오죽하면 그랬겠냐"를 연발하는 마을대표 오지라퍼였다.

하안도서관 북토크, 오른쪽분 정지아 작가님

 정지아 작가님이 북토크에서 직접 고백하셨듯이 부모님과 얽힌 사람들과의 질척한 인연은 까칠한 시티걸(정지아 작가본인 피셜)에게 적잖이 불편함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혼자서 치르기 힘든 장례식은 그런 끈적한 인연들의 힘이 없었으면 아마도 해내지 못했을 거라고 고백했. 그의 소설 속에서는 사람들과의 거리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웠.


조금 전 통곡하던 사촌들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시끌벅적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활기찬 담소와 통곡 사이 어디쯤에서 서성이며, 나는 깨죽이 담긴 쟁반을 든 채 우두커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꿈결처럼 모든 것이 낯설었다. (98p.)



Part 2. <이방인>


멀고 도 먼 어머니의 죽음

하지만 카뮈의 <이방인>에서 나오는 뫼르소와 어머니의 죽음은 심리적 거리가 멀어 보였다. 특히, 아들인 그에게도. 그는 슬픔을 참아내는 그 어떤 몸짓도 하지 않았고 동네방네 일가친척이 모여 애도를 표현하는 것도 없는 건조한 모습이었다. 오히려 장례 후 여자친구와 시시덕거리고 덤덤하게 어머니의 죽음을 처리하는 모습을 보였다. 혼란스러웠다. 이것은 몰인정한 아들의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 것인가. 극도의 슬픔에 압도되어 어쩔 줄 모르는 나약한 인간의 표현인가.



Part 3. 나의 아버지


결국, 부모도 넘어야 할 또 하나의 산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기본적인 것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힘겨워했다. 어린 나이에도 그들의 애씀이 눈에 보이니 투정도 칭얼거림도 내 기억엔 부리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도 머리가 크고 세상을 알아갈 즈음, 아버지는 나약하고 허점이 많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어쩌랴. 나도 아버지도 서로를 선택한 건 아니니, 서로에게 최선을 다할 뿐 화낼 일도 자책할 것도 없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부모의 그림자는 내 삶 곳곳에 그늘을 드리웠고 알 수 없는 답답함과 분노로 나의 감정과 선택을 뒤흔들어놓았다. 부모는 내게 빈곤한 현실과 아무리 애써도 깰 수 없는 벽을 깨주기를 바랐다. 열심히 공부해서 좀 더 나은 직장을 갖는 것, 안정된 삶을 사는 그것이 유일한 꿈이며 바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길들여졌고 그것에 순응했다.

 

나는 곧 깨달았다. 착한 사람만이  사는 것도 아니고,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서 세상이 바뀌것도 아니라는 걸. 부정부패한 이들이 권력을 갖고 순응하는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어질어질했다. 세상은 이상했고 새로운 답이, 새로운 틀이 절실했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결국 순응하는 삶의 한계를 스스로 넘겨야 했다.


책을 펴고, 세상을 읽고, 나를 쓰고

아버지가 내게 준 것 이상의 진실을 보고 경험하고, 그 진실들을 사용해 내 정신을 구축할 수 있는 특권, 나는 수많은 생각과 수많은 역사와 수많은 시각들을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믿게 됐다.

출처. <배움의 발견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내 안의 불안함을 잠재워 줄 의식은 여러 가지 시도 끝에 글쓰기에 다다랐다. 첫 번째로 책을 폈다. 불안한 내게 옛 현자들을 지혜가 가득 담긴 문장들을 내놓았다. 내 안의 답답함을 풀어줄 문장들을 만나면 시커멓게 밑줄을 그으며 탐닉했다. 세상의 혼돈을 밀어낼 글들을 게걸스럽게 찾아다녔다. 이런 노력으로 퍼즐 맞추듯 내 안의 불안과 공허가 천천히 메꾸어지는 것 같았. 우연한 기회에 운명처럼 글쓰기는 내게 다가왔고 쓰는 나를 만났을 때, 나는 조금 더 온전해졌음을 느꼈다.


한동안 나는 초고속으로 달리는 세상이라는 열차가 오고 가는 플랫폼에 덩그러니 서 있었던 것 같다. 행선지를 모른 채 나는 그 어떤 기차에도 오를 수는 없었던 거였다. 사람들은 떠나고 머무르고 지나치고 영화 속  슬로모션처럼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있었다. 여러 시도 끝에 불안함을 잠재우는 목적지로 쓰기를 택했고 그곳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제 복잡했던 말들이 가지런한 글로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나는 나를 바라볼 용기를 얻게 되었던 게 아닐까.


질척한 부모의 모습을 보인 <아버지의 해방일지> 속의 아리도  부모에게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이방인>뫼르소도 부모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다. 부모의 그림자로부터의 완전한 해방이란 없는 것일까. 어떤 형태로든 새로 태어나기를 갈망하지만, 자신의 태어남의 근원인 부모를 거스르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결국 부모라는 산을 넘어 각자의 행로를 개척해야 하는 수밖에. 지나온 행적은 뒤로 하고 새롭게 발걸음을 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결국 지나온 과거를 제대로 봐야 새로운 행로의 방향을 정할 수 있을 것이다. 멈출지 나아갈지는 지금의 내가 선택하는 것일 테고. 과거의 지도는 부모에게서 나왔지만 현재의 지도는 내가 만들어야  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부모가 준 지도의 막힌 길에 다다랗던 나는 별 수 없이 책을 꺼내 들었다. 그것을 읽음으로써 먹고사는 막다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 설익은 생각을 나눔으로써 불안의 터널에서 나와 공감이라는 출구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쓴다는 행위로 비로소 나는 나의 지도희미하게라도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배움으로 얻은 특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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