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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개의 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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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Sep 05. 2023

이토록 눈부신 날, 우린 왜 여기에

천 개의 품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서이초의 젊은 선생님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49재를 맞이하는 마지막 집회. 늘 빚진 마음이었다. 카톡방에 같이 가자는 지인의 말에 내 마음이 흔들린다.


오늘은 둘째 아들과 친구들을 데리고 대학탐방을 가기로 했었다. 같이 가는 엄마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결국 나는 여의도로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먼저 와 계신 선생님들이 많이 혼잡할 거라는 말을 해주셨지만 막상 도착해 보니 국회의사당 한참 전 큰 길가에서부터  검은 옷의 물결이 넘실거린다. 저 멀리서 쩌렁쩌렁 울리는 확성기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는
꽃 같은 어린 나이의 교사를
벌써 몇 명이나 떠나보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그 절절한 목소리를 멀리서 듣기만 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목이 멘다. 눈물을 훔치고 무엇에 홀린 듯 목소리가 시작되는 곳을 찾아간다. 여의도 공원에 내려 공원을 가로질러 길을 따라내려가니 국회의사당 쪽으로 향하는 길 전체에 검은색 점의 행렬이 벌써부터 빼곡하다.

아직 여름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9월 초, 작열하는 햇빛 속에 20만 명 이상의 교사가 모였다. 엄청난 인파 사이로 대형버스가 수십 명의 사람들을 쏟아내고 사라지고를 반복한다. 2시를 알리는 소리와 함께  집회가 시작된다.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위로하는 묵념을 하자는 목소리에 모두 동시에 눈을 감는다. 순간, 극단적인 선택하고 만 풋풋하고 어린 교사의 고뇌에 찬 모습이 보인다. 쓸쓸하게 혼자 남겨진 서늘한 교실도 눈앞에 펼쳐진다. 이내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여기저기 이름 모를 선생님들의 낮은 흐느낌도 같이 전해진다. 이런 느낌을 이심전심이라고 해야 할까.


이 맑은 날, 우린 이곳에 와 있나.

세상이 힘들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사람이 사람에게 화를 내고 욕을 하고 흉기를 들고 강제로 그들의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자신의 아이를 돌보는 사람이, 자신과 일을 하는 직장 부하직원이, 매일 생필품을 전해주는 택배직원이, 낮은 자리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의 소리 없는 죽음과 외침이 잦아지고 있다. 누구의 잘못인지도 모를 억울함들이 켜켜이 쌓여 불특정 다수에게 분노가 폭발하듯 터지고 있다. 돈과 권력을 앞세워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그 누군가가 많아질수록 숨죽여 우는 낮은 곳의 흐느낌도 커져만 간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함부로 대하는 무례함을 멈춰야 한다. 그 하나만을 지켜내는 것만으로 족하다. 이성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악성민원이 두려워 아이들에게 제대로 된 훈육 한번 하기 힘든 아동보호법의 단단한 족쇄가 교사에게 채워져 있는 한 건강한 교육은 기대할 수 없다.


때리고 밀치고 욕하고 싸우는 아이들을 말릴 수도, 잠자는 아이를 깨워 같이 공부하자고 격려할 수도 없다. 아이들을 위해 한 번 더 손을 내밀고 한번 더 다독거렸던 따스했던 손길을 거두어들인다. 이 모든 행동이 아동폭력으로 고발될 수도 있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가 심심치않게 들리곤 했다. 그 어떤 행동도 마음대로 할수 없는 위축되고 무기력한 시간이 흐르고 있다. 밥을 못 먹는 아이들에게 밥을 사주면 거지취급하냐고 따져 묻는 아이들과 부모들이 있다고 하니 도대체 교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꼬이고 엉켜 버린 마음들 속에서 열정과 사랑을 아동폭력으로 낙인찍는 세상 속에서 교사들은 흡사 AI 같은 매뉴얼로 아이들을 학부모를 대해야 한다고 세뇌하듯 자신을 다잡고 있다. 이것이 정상인가.


약은 약사에게, 처방은 의사에게, 교육은 교사에게 맡겨야 한다. 교육의 전문가인 교사를 믿어달라고 당당하게 교육할 수 있는 발판을 사회적 안전망을 만들어달라고 이 뜨거운 태양아래 외치고 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분하는 어색하고 차가운 법의 논리가 교실을 점령하지 말아야 한다. 싸움은 화해로 갈등은 조율로, 이해와 존중의 씨앗으로 진한 우정과 존경을 키우는 교실을 우리는 원할 뿐이다.



보육이 아닌 교육이 먼저인 교실을 되찾을 수는 없을까. 회사에 일터에 메인 엄마와 아빠가 자유롭게 아이 돌봄을 위한 시간을 낼 수 있는 구조가 먼저지. 아이들을 밤 8~9시까지 돌보는 학교시스템 구축이 먼저일까. 아이들을 깜깜한 복도 끝 깜박이는 교실 한 구석에 밤늦게 까지 머물게 하는 보육은 누굴 위한 것인가. 정치가들의 인기몰이에 아이들의 돌봄이 희생되지 않기를, 교사들의 열정을 무한대로 요구하지 않기를, 다만 일터에서 부모가 어서 돌아와 가족과 함께 하는 가정의 모습을 되찾기를 바란다. 안정된 가정 속에서, 내 아이를 넘어선 공동체를 생각하는 배려와 상식의 풍토 속에서 아이도 교사도 행복한 교육과 희망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배운다는 건 꿈을 꾸는 것
가르친다는 건 희망을 노래하는 것

-간디학교 교가 일부-


edited by 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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