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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권하는 사회

충성심이 홀대받는 휴대폰의 세계

by 화요일

2020년에 새로 산 휴대폰을 올해로 5년째 사용 중이다. 별다른 문제없이 멀쩡하다. 그런데 아이들과 애들 아빠는 다른 통신사로 갈아타서 나만 홀로 가입된 상태. 문제는 가족할인, 인터넷 결합할인이 모두 사라져서 월납입금액이 3만도 넘게 훌쩍 뛰어버렸다는 것이다. 워낙 기계치라 이것저것 재고 따지는 걸 귀찮아한다 해도 월 8,9만 원의 요금은 부담이다. 위기의 순간에 봉착. 쓰고 있는 통신사에 묻는다.


제가 이 통신사만 4년 넘게 쓰고 있는데 혼자 쓰면 아무 할인도 없는 건가요?

네. 고객님...


상담원도 당황스러운지 말문을 잇지 못한다. 그럼 결국 갈아타야 한다는 얘기. 번호이동만 하면 나중에 기기변경할 때 또 이런저런 혜택을 못 받으니 기기변경까지 하는 게 낫다고 지인들이 충고한다.


멀쩡한 기계를 버리라고?!

어디 핸드폰뿐이랴. 옷도 신발도 신상이 나오면 멀쩡한 것을 두고 새것으로 바꾸라고, 전단지에 문자에 온갖 광고로 유혹의 손짓을 한다. 이사를 하며 가전을 바꿔 본 사람은 안다. 무조건 신상품을 사야 혜택이 좋다는 걸. 해가 지난 모델, 유행이 지난 기계는 성능에 아무 문제가 없더라도 혜택이 없고 상대적으로 더 비싼 물건이 되고 만다. 결국 기본 기능은 별차이가 없는 새것, 신상으로 싹 다 새로 사게 다. '이래도 되나?' 석연찮은 기분에 휩싸인다.


버려진 물건은 어디로 갈까.

우리 집에는 쓰지 않는 휴대폰이 세월의 흔적을 안고 구석구석에 쌓여있다. 언젠가 살을 빼면 입겠다고 쌓아둔 옷도 천지다. 결혼초에 입었던 예복, 원피스, 수영복이 10년도 넘게 주인을 못 찾고 쌓여만 있다. 그마저도 몇 번의 이사를 하며 짐을 싸고 풀고 하는 와중에 잡동사니 틈에 끼어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다. 동시에 살을 빼겠다는 나의 의지도 연기처럼 증발.


물건의 수명은 화려한 신상 앞에 무색할 뿐

온전한 옛 것도 홀대받는 마당에 고장 난 것들은 더 갈 곳이 없다. 살이 부러진 우산, 멈춘 시계, 해진 옷 등등 아직 쓸만하지만 작은 하자가 있는 물건은 어느새 쓰레기통으로 가버리고 만다. 나눔이나 기부를 하려 해도 사용감이 있는 물건은 받기 꺼려하고 주기도 미안하다. 빠르게 정리하고 싶다면 돈을 내고 버려야 한다. 수리하고 고쳐 사용하는 비용이 새로 사는 것만 못하니 계속 버리고 사는 것을 욕할 순 없다. 비용과 가격, 편리함의 기준에 못 미쳐 내팽겨진 튼튼하고 오래된 물건들이 한없이 처량해 보일 뿐.



배신과 소비를 부추기는 시대

손때 묻은 낡은 물건을 버리고 새것을 사는 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그동안 오랜 세월을 같이 보낸 역사를 뒤로 하고 신의를 버리는 것처럼 매정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건 하나에 지나친 감정이입을 한다고 누가 웃을 수도 있겠지만 무작정 버리고 사는 악순환의 고리가 불편한 건 사실이다. 성장형 경제의 덫에 걸까. 더 이상 소비가 필요치 않은데 소비를 하지 않으면 손해를 보게 되는 이상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한 통신사를 오래 쓰면 할인이 되고 고마워하는 게 아니라 오래 쓰면 쓸수록, 충성하면 할수록 손해 보고 바보취급을 당하는 것만 같다... 왠지 슬프다.



사람도, 마음도 환불되나요?

쉽게 사고 써보고 마음에 안 들면 환불하고 버리고 그리고 또 사고. 사람들의 관계도 혹시 이렇게 되었을까. 종종 이런 사람들을 만난다. 직장에서 모임에서 만나고 이야기를 하고 관계를 이어가고 그러다 크고 작은 갈등이 생기면 아무 말 없이 소위 잠수를 타는 사람. 아무 일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사라지면 당황스러움에 어리둥절하다. 관계도 사람도 쓰다 버리면 되는 걸까? 마음에 안 들면 환불하면 되는 걸까?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아마도 비용이 부담되어 새 폰으로 사게 될 것 같다. 그런데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까. 누군가는 새 폰이 너무 좋다는데. 나는 사진이며 모바일뱅킹이며 자동로그인이며 바꾸고 다시 해야 하는 일이 귀찮음 플러스 괜스레 헛헛한 마음을 떨치기는 힘들 것 같다. 고작 휴대폰 하나 바꾸는 일에 이렇게 진지할인가? 내가 이상한지 세상이 이상한지 나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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