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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화요일 Feb 02. 2024

불견, 불문, 불언

발길따라 마음따라  : 여수

여수에 왔다.

친한 벗 둘과 함께 하는 여정이다. 시간은 짧고 건강도 유한하니 지금, 현재 내 안의 욕구에 충실하게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마침 시간도 되는 날엔 누군가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한 하고 싶은데로 발 길 닿는 대로 선심 쓰듯 스스로를 다잡지 않고 내버려 둔다. 이렇게 생각하니 여행이 훨씬 쉬웠다. 거창한 계획은 없다. 하루에 한 두 곳 여유롭게 다닐 뿐.


절벽 위에 세워진 암자, 향일암

택시를 타고 행선지가 '향일암'이라고 외치자, 기사가 놀란다. 여행객들이 잘 가지 않는 곳인데 의외라고 하시면서. 이유를 물으니 거리가 시내에서 멀고 택시비도 많이 나오니 사람들이 잘 안 온다고, 그래도 너무 좋은 곳이니 이렇게 오기로 한 건 정말 잘 한 결정이라고 기분 좋게 말씀해 주신다.


기사님은 가는 길 내내 여수의 이모저모를 현지인 가이드처럼 설명해 주신다. 여수 돌산읍 금오산의 깎아지른 해안 절벽 위에 위치한 향일암은 양양 낙산사 홍련암, 남해 보리암, 강화 보문사와 함께 '4대 관음성지'로 꼽힌다. 산등성이에 있는 향일암은 해를 향하고 있어 향일암이라고. 그래서 일출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불교에서 관음성지란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으로, 소원을 빌면 그 어느 곳보다 관세음보살의 가피(도움)를 잘 받는다는 믿음의 장소라고 한다.


가파른 산 위의 중턱까지 아슬아슬하게 운전해서 우리를 내려놓고 기사님은 홀연히 사라지신다. 부슬부슬 새벽비가 내린 후라 산 위의 공기는 몽롱한 정신에 찬물을 확 끼얹는 것처럼 상쾌했다. 위로만 올라가는 계단만 까마득히 보여 아득했지만 기사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힘을 내서 쉬엄쉬엄 올라간다. 숨이  때쯤 하나씩 보이는 석상, 그 귀여운 모습에 까르르 웃음이 난다. 얼른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석상 앞 검은 석판에 쓰인 글을 읽으며 숨을 고른다.



불견(不見)

남의 잘못을 보려 힘쓰지 말고
남이 말하고 행하지 않음을
보려 하지 말라.
항상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옳고 그름을 살펴야 하리.

남의 잘못된 행실은 눈에 정말 잘 보인다. 나의 행실은 돌아보지 못하고 남의 잘못을 탓하는 것은 참 쉬운 일이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스승인 것을 우린 종종 잊고 산다. 옳고 그름은 눈에 보이는 것, 그 너머에 있음을 잠시 상기시키며 다시 걷는다.



불문(不聞)

산 위의 큰 바위가 바람에
흔들리지 않듯이
지혜로운 사람은 비난과 칭찬의 소리에도 평형을 잃지 않는다.
불문 석상

언제쯤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까. 남들의 칭찬에 기뻐 날뛰고 어설픈 비난에 금방 푹 꺼지는 나는 깃털처럼 가벼운 존재다. 든든하게 버티는 바위의 무게는 어디서 올까. 예측할 수 없는 삶의 굴곡에서 시시때때로 변하는 감정은 어럽게 다잡아 놓은 의지와 신념을 어느새 흔들어 놓고 만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감정에 흔들리지 말자고 수십 번 수백 번 다짐하지만 돌아서면 어느새 세상풍파에 여지없이 무너지는 약한 나를 발견하 곤 한다. 내 안의 신념을 다지고 그저 묵묵히 나아가자. 남의 인정에 일희일비하는 가벼운 신념 말고 내 안의 묵직한 신념을 단련하는 일에만 집중.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일이다.



불언(不言)

나쁜 말을 하지 말라. 험한 말은 필경에 나에게로 돌아오는 것.
악담은 돌고 돌아 고통을 몰고
끝내는 나에게 돌아오니
항상 옳은 말을 익혀야 한다.


 내 안의 분노와 불만이 쌓이면 기어코 누군가에게 쏟아내고 만다. 순간 답답함은 가시지만 그런 내가 한없이 한심해 보인다. 답답함의 근원은 내 뜻 대로 하고 싶은 욕심, 내가 원하는 답을 듣고 싶은 기대, 좋은 말만 듣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에서 나왔으리라. 내 입 밖으로 불만은 내뱉는 순간, 나의 부족함도 만천하에 공개되고 만다는 것을 종종 망각하곤 한다. 그 부족함은 나의 결점으로 그들 눈에 자리 잡게 되고 부메랑처럼 나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그것을 다 알면서도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해탈문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가파른 계단에 올라서니 좁디좁은 해탈문에 다다른다. 불견, 불문, 불언 세 가지 지혜를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임을 말해주는 걸까. 보살을 알현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욕심과 가벼운 신념을 버리고 가냘프고 배고픈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해탈의 경지에 오르게 됨을 알려주고 있는 걸까. 몸을 옆으로 비틀고 배에 힘을 팍 주고 좁은 문을 통과하니 비로소 탁 트인 바다가 내려다 보인다. 욕심을 비우고 자신을 가볍게 얇게 만들고 참고 고민한 자만이 넓은 전체를 활공하듯 높은 곳에서 볼 수 있는 걸까. 시원한 바닷바람이 가늘게 숨을 고르는 내게 곧 괜찮아질 거라고 잘하고 있다고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고 지나간다.


그래. 모두에게 인정받으려고
애쓰지 말자.
그저 스스로를 믿고
뚜벅뚜벅 걸어가면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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